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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내 무분별한 영어 강의를 반대한다

(*2012년 2학기 교내 영어 에세이 대회에 제출했던 것을 1년 반만에 한국어로 번역했다. 시간이 흐른 만큼 일부 내용이 보충, 편집됐다.)

 

매년 중앙일보가 발표하는 대학평가에서 영어강의 비율은 꽤 중요한 기준이다. 영문과 및 다른 외국어 전공학과를 제외한 전체 학부 전공과목 가운데 30% 이상이 영어로 이뤄질 경우 만점이 부여된다. 많은 사람들은 요즘처럼 영어가 ‘세계 공용어’인 세상에서 영어 강의는 필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무분별한 영어 강의에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도 교수도 모두 이득을 보지 못하는 것이 영어 강의다. 강의 언어로서 영어가 과연 효율적인지 한 번 고민해 봐야 할 때다.

한국이라는 환경에서 영어 강의는 교육을 위해 좋은 수단이 되지 못한다. 물론 몇몇 학과나 과목에서는 영어가 핵심일 수 있으며, 그런 경우엔 영어 수업이 필요할 것이다. 영어라는 언어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중요성을 과장하고, 모두에게 영어 사용을 강제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는 의문이 든다. 우선 학내 교강사 대다수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도를 온전히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 학생들에게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질문하길 꺼리는 한국 학생들은 영어 강의에선 질문을 극도로 자제한다. 결국 수업의 질과 효율성 모두 하락한다.

연세대학교의 한경희 책임연구원(공학교육혁신센터), 허준행 교수(토목환경공학과), 윤일구 교수(전기전자공학과)는 지난 2010년 발표한 ‘글로벌 공학인재 양성을 위한 영어강의의 역할과 과제‘에서 의미 있는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보고서에 의하면 교수와 학생 모두는 영어강의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이것의 가장 큰 이유는 “강의에 투입되는 노력과 시간이 큼에도 불구하고 강의 만족도는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한국어 수업에 비해 투자할 시간·노력과 수업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를 보자. 학부생은 영어 수업 준비에 2.63배의 시간과 노력을 더 쏟았지만 만족도는 70% 선에 그쳤다. 같은 조사 항목에서 대학원생은 1.91배·77%, 교수는 2.11배·74%의 결과를 보였다.

이런 현상은 내가 학부 시절 들었던 수업에서도 일어났다. 참고로 나는 영어영문학과 학생이다. 우리 학과 학생들은 전공이 전공인지라 수업 준비 과정에서 느끼는 중압감은 다른 학과 학생들에 비해 가벼운 편이다. 문제는 수업 시간이다. 뭔가 불분명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나와도, 학생들은 질문하기를 주저한다. 가끔 주어지는 조별 토의 시간에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해 답답해하는 장면들이 속출한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학생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다. 이때 의견 교환의 언어는 물론 한국어다.

영어 강의에 발목 잡히는 것은 학생뿐만이 아니다. 2009년 교수신문 기사에 의하면 현직 교수들은 ‘번역서+한국어’강의보다 ‘원서+영어’ 강의에서 수업 진도가 1/3수준으로 떨어진다고 공감했다. 또한 지난해에는 카이스트 교수들이 학내 전면 영어 강의 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관련 기사 1·기사2) 박승오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강의는 교수와 학생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라며 “대다수의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을 영어로 강의한다고 하면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강의에 집중할 수 없고, 동기 부여가 망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역학’ 교과목을 예로 든다. 기초 응용수학 지식이 필요한 학문임에도, 학생들은 강의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 자신의 영어 실력을 탓하거나 영어를 잘하게 되면 해당 과목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겪었던 한국인 교수의 영어 강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꽤 많은 영어 강의를 수강했지만, 너무나 자주 들었던 말은 ‘You know’, ‘kind of’, ‘sort of’ 등의 표현이었다. 아마 다른 학과 사정은 더 심각하리라 생각한다. 나는 지금 교수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만은 분명히 하고 싶다. 대다수의 교수들 역시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어 모국어 화자들이다.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삼는 사람이 영어 강의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탓해야 할 것은 이상하게 돌아가는 ‘제도’와 영어 강의를 둘러싼 ‘미신’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수업시간에 쓰면 영어 실력이 저절로 향상될 것이다’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 마치 2000년대 초반 한국을 강타했던 영어 공용어화 논리와 비슷하다.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우리의 영어 실력을 키워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한다면 수월하게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라는 당시의 목소리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함께하기 위해 대학의 영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영어로 강의를 하면 될 것이다”라는 메아리가 되어 울리고 있다.

이론이나 상상 속에서라면, 영어를 수업 시간에 많이 쓸수록 학생과 교수의 영어 실력은 분명 향상된다. 하지만 그런 의견은 한국이 철저한 한국어 중심 언어공동체라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순진무구한 기대에 불과하다. 국민 절대다수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국어로 생활하고, 거의 대부분의 국내 정보는 한국어를 타고 흐른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생활에서 쓰는 사람은, 자신의 일상생활 반경을 좁디좁은 ‘영어 화자들 속’에 한정하게 될 것이다.

또한 ‘영어 학습’과 ‘영어 이용’이 다른 층위에 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자신이 익힌 외국어의 수준만큼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 government, lawmaker, policy 등의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정치에 관해 영어로 얘기하기 힘들 테다. as well as, rather than, not so much A as B 등의 표현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많은 개별 단어를 알고 있어도 능숙하게 자기 생각을 펼치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표현할 만큼의 영어 실력을 미리 쌓았는가이다.

몇 해 전 수강했던 영어학 과목에서, 하루 수업의 핵심은 ‘표준편차’였다. 한국어로 설명했더라면 표준편차는 이해하기에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들 고등학교에서 배웠을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당 교수님은 ‘standard deviation’을 영어로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셨다. 학생들도 ‘standard deviation’이 무엇인지 몰라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날 강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에겐 통계학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고 이해할 만한 영어 실력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어로 된 통계학’을 몰랐다.

영어 강의가 낳은 것은 영어 실력도 잡고 전공 지식도 확충하는 일석이조가 아니라, 오해와 시간 낭비의 악순환이었다. ‘학술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영어 실력 자체가 그에 맞는 수준으로 먼저 보장돼야 한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무턱대고 영어 강의를 한다고 해서 영어 실력이 대학 수업에 걸맞은 수준으로 저절로 향상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런 현재의 흐름 외에, 역사적 사실도 한 번 생각해 보자. 조선 이래 한반도에서 전 세계가 공유하는 지식이나 철학이 만들어졌는가 생각해보면 답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뛰어난 학자들이 분명 존재했지만, 그들이 당대 학문의 국제 흐름을 주도했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중국이 정신적, 학술적 유산을 한자로 차곡차곡 기록하는 동안, 우리는 한자를 차용해 그들을 따라가기 바빴다. 심지어는 한국어에 가장 알맞은 문자인 한글 창제 이후에도 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따라잡는 데만도 여력이 모자랐다. 해방 이후 영어가 대세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60년째 우리의 아버지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따라가기 바쁘다.

이것은 단순히 영어(혹은 다른 외국어)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영어 못하기로는 한국 못지않은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19명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수상 실적이 해당 국가의 학문 독창성과 국제 흐름 선도 여부를 100% 나타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대략적인 위상이나 분위기는 반영하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영어 실력이 아니라, 독창적인 사고방식과 독자적 철학이다. 극단적인 사례로는 일본의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수가 있다.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노벨상 시상식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영어로 된 물리 용어는 안다. 그러나 영어로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물리는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극단적 사례를 제외하더라도, 영어보다는 자신의 본질적 실력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개인의 실력과 독창성은 모국어와 함께 더욱 효과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의 수많은 사례가 증명한다. 칸트는 3대 비판서를 모두 모국어인 독일어로 저술했다. 이것은 독일어로 쓰인 최초의 철학서였다. 칸트는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남았다.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도 자기 모국어로 작품 활동을 했다. 결과적으로 영어는 독특한 생기를 부여받았고 셰익스피어는 영원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전자기학의 아버지’ 마이클 패러데이는 제본소 견습공으로 일하면서 과학 서적을 탐독했다. 제본소에 들어온 우수한 책들이 “영어로 쓰인” 덕분이었다. 그는 훗날 ‘전자기유도의 법칙’을 알아냈다. 오늘날 대부분의 발전소가 기본적으로 활용하는 법칙이다. 이렇게 칸트, 셰익스피어, 패러데이는 각자 모국어를 통해 뛰어난 성과를 일궈냈다.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영어 강의가 적합한지 아닌지를 묻는 목소리 자체가 매우 작다. 그리고 어쩌면 미래의 한국은 지금까지의 한국과 다를지도 모른다. 영어가 모두에게 친숙하고 쉬운 언어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통해 독창적인 학문 성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미래 세계에서는 영어만큼이나 중국어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관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독창성을 위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독창적인 것은 모국어를 통해 더 쉽게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언어를 배우는 일과 그 언어를 학술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다. 적정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설익은 영어는 학문을 발전시키기는커녕 어이없는 해프닝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 창의성, 독창성, 그리고 우리의 학문 정체성 등을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때다. 얼마나 많은 강의가 영어로 진행되는가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참고 문헌·기사·자료>

글로벌 공학인재 양성을 위한 영어강의의 역할과 과제 (한경희, 허준행, 윤일구)

‘무늬만’ 강의 늘어 … 교육 質 제고 시급하다 (교수신문 최성욱 기자)

“국제화가 아니라 미국화” KAIST 영어강의 논란 (헬로디디 임은희 기자)

KAIST 교수들 “영어강의는 국제화 아닌 미국화” (연합뉴스 박주영 기자)

노벨상 수상 마스카와 교수와 영어 (서울신문 박홍기 기자)

일본 노벨상 19명, 과학분야만 16명…비결은? (SBS 유영수 기자)

백종현 교수 “칸트와 함께 ‘이성의 한계’ 너머 희망 얘기할 때” (동아일보 권재현 기자)

“식민지도 아닌데 왜 영어로 수업하나” (한겨레21 이정훈 기자)

EBS 클립뱅크 : 최고의 실험 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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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관해

한글날 맞이 썰 1,2

*둘 다 지난해 한글날 즈음 페이스북에 작성했던 글인데, 평소 내 생각이 잘 드러났기에 페북 피드에 묻히게 방치해두고 싶지 않아서 옮긴다. 원문을 그대로 복사했기 때문에 평소 블로그 글의 어투와는 차이가 있다. 오타나 어색한 표현을 제거하기 위해 최소한의 수정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썰 2번에서 말했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 것 같다.


 

[1]

한글날을 맞이해 온 언론이 들썩들썩..

딴지걸고 싶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애들이 말을 줄이든 말든 신경좀 꺼. 아주 자연스러운 언어 현상. 세대 간 언어차이는 단군 이래 항상 존재했던 현상. 반대로 생각좀 하면 어디가 덧나나?
‘애들이 쓰는 말을 어른이 못알아듣는다’만 때리지만, 사실 어른들이 쓰는 말도 애들은 못알아듣습니다. 이 글 보는 분들 중에 ‘후앙’이 뭔지 아는 사람?

2. 한글이랑 한국어좀 구분해서 썼으면 좋겠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 한글은 맞지만, 한국어는 그냥 언어들 가운데 하나일 뿐. 다만 한국어는 언어 자체로 봤을 때 좀 특이한 구석이 있음– 도통 뿌리를 찾기가 힘듦: 알타이 어족에 속한다는 게 일단 가장 널리 알려진 견해지만, 그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음. 물론 그 반론의 성격은 ‘알타이 어족’으로 보기 힘들다’는 정도지, 한국어의 뿌리를 다른 어딘가에서 찾아오지느 못하고 있음

3. 외래어는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그 의미가 나타내는 바를 현실 속에서 ‘우리화’하려고 노력해야할 대상이지 배척해야할 ‘찌꺼기’ 가 아니다.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이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새끼 재수없다’는 느낌을 들게 하거나 ‘ㅄ 뭔소리하는거야’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에 무한정 늘어나기가 힘들다고 생각함.

4. 한국어/한글 지키기는 공교육 국어 교육이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으니 한국어단체 관계자분들은 쓸데없이 방송 나오거나 캠페인 벌이지 말고 교육부를 조지세요. 정갈하고 아름다운 한국어 시, 소설, 산문을 읽고 자란 학생은, 말하지 말라고 해도 매끄럽고 명확한 한국어 문장을 말하고 쓸 겁니다.

5. 그리고 글쓰기 교육좀…. 한 편의 글에 주어-술어 불일치는 기본이며 각종 비문이 넘쳐나는 경우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많다. 학생들한테 글을 쓰게 시켜봤어야지… 영어랑 한국어를 비교하면 난 그래도 한국사람이니까 한국어를 더 좋아하지만, 적어도 글쓰기 문제에 관하자면 우리나라는 미국/영국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2]

한글날 맞이 썰 2탄. 단어가 단어니만큼 어조는 아주 경건 경건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41477 를 읽고…)
인터넷상은 말할 것도 없이, 2013년을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섹스’라는 단어는 이미 자리를 잡을 대로 잡은 ‘한국어 단어’다.

비록 유래가 서양일지언정, ‘섹스’는 한국 사회가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동안 꾸준히 한국어 사용자들의 어휘 목록에 자리잡았으며, ‘성행위’, ‘성관계’보다 훨씬 친숙한 일상어가 됐다.

그리고 인터넷의 확산과 자유분방한 사회 풍조에 따라 ‘섹스’는 여러 단어와 결합하며 한국어 사용자들의 언어 생활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비록 그것들이 음지에 한정돼있고, 대부분 음담패설과 관련돼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게다가 ‘섹스’의 형용사형 단어 ‘섹시’는 이미 언론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아주 일상적인 한국어다. ‘야하다’는 말에 담긴 천박함과 ‘성적 매력이 있다’는 말의 노골적임을 피할 수 있는 단어다. ‘섹시’를 한국어 어휘에서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제거했을 때 우리 언어 생활은 불편해지면 불편해지지, 결코 편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섹스’는 ‘드립’과 결합해 ‘섹드립’이라는 절묘한 조어까지 낳았다. 신동엽이 “어머님이 걱정하시는 그건 낮에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거나, 사이먼디가 “다이어트 할 뻔 했는데”라고 말하는 모습을 두고 우리는, 그리고 각종 매체는, 아무렇지 않게 ‘섹드립’을 내뱉었다 칭한다.

‘야한 농담’과 ‘음담패설’이 풍기는 비릿한 냄새가 ‘섹드립’에서는 감지되지 않는다. 물론 몇몇 순진무구한 영혼들이나, 외국어 사용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일부 한국어 순혈주의자들은 ‘섹드립’이라는 단어가 2013년 일상 한국어에 자연스럽게 어울린다는 사실이 불편하겠지만.

정리하자면, ‘섹스’는 자연스러운 한국어 단어다. 그것도 다른 단어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은 한국어 단어.

상황이 이럴진대, ‘섹스’를 ‘니디티’로 바꾸자는 노력은 헛수고에 수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특정 단어와 그에 얽힌 행위가 금기시되는 현상은 현실 세계의 노력으로 개혁해야지, S-E-X에 해당하는 한글 자판 ㄴ-ㄷ-ㅌ를 이용한 말장난으로 개혁할 수는 없다.

마치 ‘왕따’를 대신할 말을 만든다고 해서 왕따 현상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처럼, 혹은 ‘병신’을 대신해 ‘장애인’이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한국 장애인들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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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공부해도 안 되는 영어”라는 미신

일단 광고 한 편을 보고 시작하자.

대개 우리나라 영어 사교육 광고에서, 영어 못하는 사람은 저렇게 ‘답답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한국 영어 사교육 광고 대다수의 주된 메시지는 ‘영어 못하는 당신은 바보’다.

‘너 바보’라는 메세지를 강하게 뒷받침해주는 단골 멘트가 있다. 바로 ’10년 넘게 공부해도’로 시작하는 몇 가지 전형적 문장들이다.

10년 넘게 공부해도 말 한마디 못 한다.

10년 넘게 공부해도 외국에 나가면 쓸모가 없다.

10년 넘게 공부해도 원어민과 대화를 할 수가 없다…

과연 우리는 정말 10년 넘게 영어공부를 해왔을까? 그렇지 않다.

이제 ’10년 넘게’의 미신을 물리쳐야 한다.

10년 넘게’라는 말은 단지 우리가 영어를 접한 지 10년이 넘었다는 뜻일 뿐이다. 대부분 한국인들에게, 10년 넘게 영어를 ‘공부’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동떨어진 표현이다.

현재 20대 중반이신 분들을 기준으로 하자면, 영어를 처음 공식적으로 학습하기 시작하는 것은 초등학교 3학년때다. 그들이 10년 넘게 영어를 ‘접한’ 것은 사실이 된다.

그럼 실제로 영어를 학습한 시간을 생각해 보자. 역시 현재 20대 중반인 분들의 학창시절 10년을 기준으로 말이다.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공교육에서 영어 수업은 모두 합해서 1000시수 정도 진행된다. (‘국가교육과정 정보센터 7차 교육과정 총론‘을 참고함. 고등학교 2,3학년 시수를 160으로 계산) 그나마도 실제 정규 수업은 초등학생의 경우 40분, 중학생 45분, 고등학생 50분이다. 한 시수가 60분에 미치지도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아주 후하게 쳐서 60분이라고 가정하자.

그런데 우리는 공교육만 받는 것이 아니다. 한국 영 사교육의 뜨거운 열기를 반영해, 공교육의 2배를 배정해 보자. 주먹구구식의 근거 없는 계산이지만 내 경험과 관찰에 근거해 생각해보자면 아주 무리수도 아니다. 그러면 사교육에서 받는 영어 수업은 2000시수가 된다. 이것 역시 1시간이라 가정하고, 공교육과 사교육 수업 시간을 합친 뒤 평균을 내보자.

10년에 3000시간

1년에 300시간

1주에 5.76시간

하루에 0.82시간 = 약 50분

아무리 후하게 쳐서 계산해도, 평균적인 공교육과 사교육을 받은 대한민국 20대 청년은 학창시절 10년간 하루 평균 50분씩 영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엄밀히 따졌을 때 ‘공부’라기보다는 수동적인 ‘수강’에 가까웠을 것이다.

주말과 방학을 고려하지 않고 계산했기에 엉성한 결과다. 그러나 주말과 방학을 고려한다고 해서, 결과가 그리 희망적으로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자발적 공부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는 한계도 있다. 그러나 영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대다수의 한국 학생들을 생각해보면 ‘자습 시간’은 곧 ‘숙제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국어 화자가 영어를 쉽게 배우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 많다. 그 이유의 폭은 언어 구조의 근본적 차이부터 시작해서 한국이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강력한 단일언어 공동체라는 사실에까지 걸쳐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을 차치하고, 한국인이 영어를 못하는 간단하다.

 

영어를 안 해서 그렇다.

하긴 했는데, 수업 조금 들은게 고작이라서 그렇다.

10년 넘게 영어를 공부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똑같은 수사 표현을 다른 과목에 적용해서 말해 보자.

“10년 넘게 수학을 배웠는데, 당신은 아직도 간단한 공식 증명을 못 한다”

“10년 넘게 음악을 배웠는데, 여러분은 아직도 작곡을 못 하시네요”

’10년 넘게 미술을 배웠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현대 미술의 흐름을 몰라”

 

이제 이 글의 주제가 확실히 와닿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영어를 처음 접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순히 10년의 세월이 흘렀을 뿐이다. 우리가 영어 공부를 10년째 했다는 말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영어 강박증을 심하게 앓고 있고, 그것을 이용한 사교육 업자들이 공포 마케팅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 흐름에 떠밀려서 대다수 한국인 영어 학습자들은 자기 자신에게 저주를 내린다. “10년 넘게 공부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영어를 못하는 걸까ㅜㅜ”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자학에 빠진 한국의 성인들은 영어 사교육 업자들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된다. 논리는 간단하다.

10년을 해도 안 되었다면, 당신이 잘못 배운 것은 아닐까요? 여기 새로운 방법이 있습니다!

저희만 믿고 따라오세요! 이 방법과 함께라면 10년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광고에 속아넘어가기도 하고, 알면서 속아주기도 한다. 그래서 아래 같은 책이 유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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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을 조성하고 열등감을 부추기는 저런 영어 장사꾼들에게 가는 관심은 줄어들어야 한다.

 

영어 공부를 시작하려는 당신, 당신은 초보자다. 잘 모르는 분야에 도전하는 초보자일 뿐이다. 10년 넘게 공부했지만 아직도 영어 한 마디 못 하는 바보가 아니다.

영어 공부에 왕도는 없다. 제대로된 내용을 차분히 학습한 후, 그에 이어지는 꾸준한 연습만이 유일한 길이다. 과장된 광고 속 공부방법들은 대체로 ‘꼼수’에 불과하다. 쉬운 내용부터 시작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된다.

내 취미는 달리기인데, 달리기를 하면서 배운 삶의 지혜가 하나 있다. ‘천천히 가야 오래 간다. 오래 가야 멀리 간다.’ 아마 영어 공부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10년 넘게 공부했지만 아직도 영어를 못한다는 생각을 버리도록 하자. 부정적인 생각은 무얼 하든지 도움이 안 된다. “10년 넘게 공부했어도 안 되는 영어”라는 미신을 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