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책 읽고 씁니다

‘샤오미처럼’ 중국은 원래 강대국이었다

책비 출판사에서 나온 신간 ‘샤오미처럼’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샤오미처럼’이고 실제 내용의 70% 가까이가 샤오미 관련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30%는 샤오미의 케이스이긴 하지만 어느 모바일/인터넷 기업이든 참고할 만한 ‘스타트업 지침서’의 내용과, 텐센트 등 중국의 다른 모바일/인터넷 공룡을 이끄는 수장들의 철학을 느낄 수 있는 ‘경영 지침서’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책입니다.

샤오미의 역사와 전략을 다루는 70% 부분은 이미 알던 사실 대부분이라 그리 놀라운 내용은 없었습니다. 정작 저를 놀라게 한 내용은 ‘30% 부분’에서 훨씬 많이 나왔습니다. 제 머릿속에 떠오른 일관된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중국은 원래 강대국이었다.

인터넷 기업은 전통 산업을 존중하고 협력 파트너로 인식해 그들의 변화를 도와야 한다. 파괴자는 공공의 적이 되기 쉽고 파괴의 결과는 늘 암울하다. 기존의 시장 가치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지혜롭게 간단하고 편리한 수단과 방법을 제시하는 수준이어야 한다. 누군가 새로운 방법으로 경쟁자를 남김없이 쓸어버리면 시장이 파괴되어 결국 그 자신도 망할 수밖에 없다.

마화텅은 이 논리를 정확히 인지했다.

 

“이미 수차례 강조했지만 전통 산업은 반드시 존중해야 할 중요한 존재입니다. 절대 누군가에게 아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만 척하지 말고 진심으로 존경해야 모두가 윈윈할 수 있습니다. 위챗은 가장 기본 분야에 집중하겠습니다. 나머지 업계는 각자의 논리에 따라 각자의 공간을 채워가길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분야마다 각각의 논리와 기준이 명확해야 모바일 인터넷이 최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240쪽)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파괴적 혁신’이 모범답안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저는 그러한 파괴적 발전이 과연 공동체 전체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기업에 소속되어 일하면서 월급을 받고 생활을 이어나가는 일반적인 직원들의 삶 관점으로 경제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버나 에어비앤비는 새로운 서비스를 통해 이용자들에게 전에 없던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만, 그 생태계 안에서 노동력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사고나 질병이 발생했을 때 그 기업들은 아무런 보호막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을 문제삼는 언론인, 학자, 정치인들의 발언은 꾸준히 소개되는 편입니다. 또는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블로거들이 같은 궤적의 비판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바일과 인터넷 기업의 수장이 이런 관점과 유사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저는 이 책에서 처음 봤습니다. 중국의 초대형 인터넷기업인 텐센트를 이끄는 마화텅이 위에서 인용한 발언을 한 것이죠.

물론 텐센트가 실제로 얼마나 윤리적인 경영을 하는지, 정말로 모두와 상생을 추구하는지를 따지고 들어간다면 분명 어두운 점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텐센트의 모바일 메신저인 위챗(WeChat)만 해도 이 글을 보면 더 이상 “가장 기본 분야에 집중”하는 메신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구요.

다만, 저는 한 거대기업의 대표가 자사 서비스뿐 아니라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른 영역과 다른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책에 아래와 같은 메모를 남겼습니다.

그러고 보면 공맹, 제자백가, 사기 열전의 수많은 주인공들.. 이들의 정신은 크게 봤으면서 우리는 왜 현대 중국을 우습게 봤는가.

생각해보니 그렇더군요. 대학에 다니면서 독서 모임 활동을 할 때, 중국 고전은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언제나 올라와 있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나 논어·맹자·중용·대학의 사서는 책 욕심좀 있다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싶어하는 책들입니다. 중국은 언제나 모든 분야에서 앞선 공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고꾸라진 것은 길게 보더라도 200여년에 불과하니까요. 중국이 경제력으로나 군사력으로나 요즘 ‘부상’한다고 하지만, 어쩌면 잠시 잃어버렸던 자리를 되찾는 과정일 것이란 생각이 요즘 제 머릿속을 떠나질 않습니다.

중국의 또 다른 대표적인 인터넷 기업가라고 하면 알리바바그룹의 마윈 회장이 있지요. 그가 2013년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주최 ‘올해의 경제인상’ 시상식에서 샤오미를 평가한 말을 소개합니다.

샤오미의 마케팅은 정말 대단하지만 마케팅은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지요. 수년 이내에 샤오미의 매출액이 거리그룹을 앞설 수도 있겠지만, 그렇가고 기업의 모든 역량이 거리를 앞섰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알리바바는 곧 월마트의 세계 매출액을 뛰어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리바바가 월마트보다 좋은, 뛰어난, 앞선 기업이 되는 건 아닙니다. 지금 중국의 인터넷 기업은 시대를 잘 만난 덕분에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쉽고 빠른 것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문제는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지금 현재 얼마나 발전했는가보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286쪽)

2013년이면 이미 알리바바가 엄청나게 잘 나가던 시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윈은 절대 오만한 발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문제는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지금 현재 얼마나 발전했는가보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보면, 마치 삼국지나 사기 열전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중국 기업인들이 하는 생각이라는 것이 이처럼 넓고 깊다는 것에, 책을 읽으면서 계속 감탄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샤오미에 관한 책이라기보다, 샤오미라는 상징적 기업을 통해 중국 모바일 기업 문화를 다루는 책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의 장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세련된 편집, 특히 사이사이에 들어간 한 페이지 통째의 인용구 편집 덕분에 읽으면서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미국 IT매체인 버지(The Verge)의 페이지 디자인을 편집 디자인으로 옮겨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용문 페이지는 꽤 자주 등장하지만, 다섯 가지 추천사가 나온 곳만 촬영해봤습니다.[note]사진은 MS 오피스렌즈 앱으로 촬영했습니다. 컬러 페이지엔 약하네요..[/note]

[metaslider id=2236]

Categories
언어에 관해 책 읽고 씁니다

‘파리에서 온 낱말’ 밑줄긋기

파리에서 온 낱말

어제 저녁부터 읽기 시작해 이틀에 걸쳐 읽었습니다.  책에 관한 소개는 출판사의 소개글로 대신하며, 본문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옮겨적겠습니다. 몇몇 부분은 짧은 생각도 덧댔습니다.

출판사 책소개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프랑스어를 통해 그 말 속의 문화적 의미를 반추한 책이다. 단순히 프랑스어 낱말의 뜻을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프랑스의 에스프리를 우리 문화와 비교하며 함께 돌아본다. 우리말 속에는 알게 모르게 프랑스어가 많이 숨어 있다. 이러한 단어들을 찾아내고 어원을 밝혀내는 과정은 언어를 통해서 문화적 식견을 넓힐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이 된다.

프랑스에는 “두 가지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문화를 아는 것.”이라는 속담이 있다. 모르고 사용하면 그저 외래어일뿐이지만, 알고 사용하면 문화를 들여다보는 간편한 렌즈가 된다. <한겨레21>의 파리통신원으로 활동했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위원을 지내기도 한 정치학 박사 최연구는, 이 책에서 낱말이라는 쉽고 친근한 매개체를 통해 프랑스문화와 우리 문화를 톺아보며 지금 여기에서 프랑스적 앎과 삶을 만날 것을 제안한다.

이런 책입니다. 자세한 목차는 '이곳'에서..
이런 책입니다. 자세한 목차는 ‘이곳‘에서..

줄긋기

• 샹파뉴
우리나라에서는 샹파뉴를 샴페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심지어 어떤 기사를 보면 샹파뉴는 지방의 이름이고, 샴페인은 그 지방에서 나는 발포성 화이트와인의 이름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샴페인은 그저 샹파뉴의 영어식 발음일 뿐이다. (18쪽)

:프랑스어에 대한 필자의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

• 미슐랭
프랑스인들은 미슐랭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타이어 제작사이면서도 미식가의 성전으로 불리고 있는 레스토랑 가이드 ‘미슐랭 가이드’를 발간하고 있기 때문이다. (42쪽)

: 타이어 제작사 미쉐린과 레스토랑 가이드북 이름 미슐랭은 이전에도 각각 알고 있던 것인데, 그 둘이 사실 같은 회사라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 아따블르의 오너
여기 프랑스 지역별로 대표적인 요리들을 소개해본다. 이 내용은 요리사이자 삼청동의 프렌치 레스토랑 ‘아따블르 A table‘의 오너인 필자의 아내 김수미가 월간 <쿠켄> 등 매체에 기고해온 내용을 참고했음을 미리 밝혀둔다. (64쪽)

: 함께 프랑스에 정통한 부부라니, 조금 놀라웠습니다.

• 파티시에(르_
그런데 삼순이는 파티시에가 아니다. 프랑스어에서는 모든 명사가 남성형과 여성형으로 구별되는데 파티시에는 남성형으로 남성 제과사를 뜻한다. 삼순이의 겨우 여자이므로 파티시에르가 맞다. (78쪽)

:역시 프랑스어에 대한 필자의 애정이 느껴지는 부분.

• 영어 문화권
‘마이웨이’도 마찬가지다. 앵글로색슨의 영어 문화권에만 길들여져 그 밖의 문화에 대해서는 한없이 무지한 우리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현상이다. (89쪽)

: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저 역시 프랑스문화와 프랑스어에 무지한 입장인지라, 마치 혼나는 느낌이라 읽으면서 썩 유쾌하진 않았습니다.

• 요리와 과자
프랑스어로 사용되는 요리 이름은 너무나 많다. 메뉴menu 부터가 프랑스어다. 과자 상표에서도 프랑스어는 자주 사용된다. ‘몽쉘통통 mon cher tonton: 나의 친애하는 아저씨‘, ‘뽀또poteau: 단짝‘ 등이 있고, 제과 체인점인 ‘뚜레쥬르tous les jours‘는 ‘매일매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93쪽)

• 카바레, 살롱, 마담
생각해보면 프랑스어의 카바레, 살롱, 마담 등의 단어는 우리나라에서 모두 향락산업과 관계가 있다. 이 단어들이 이역만리 한국에서 선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이상한 용어로 둔갑돼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엄청나게 다혈질인 프랑스인들은 격분할지도 모르겠다. 카바레, 살롱, 마담 같은 말은 프랑스에서는 한없이 문화적이고 고급스런 말이며 또한 역사적으로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특히 살롱은 역사적 산물이며 지성과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용어다. (114쪽)

• 플래카드
행사장에 거는 플래카드(placard, 프랑스어로는 플라카르)도 프랑스어다. 플래카드는 게시문이나 격문을 뜻한다. (129쪽)

• 세무와 샤무아
우리가 세무로 부르는 용어는 프랑스어 샤무아chamois의 일본식 발음이다. (141쪽)

• ‘데님’의 유래
청바지 소재의 명칭 ‘데님’도 프랑스어에서 유래한다. (…) 어원을 따져보면 프랑스어의 드님de Nimes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드de는 ‘~의’를 뜻하고 님은 프랑스 남쪽의 도시 이름으로 마르세유와 몽펠리에의 중간쯤에 있는 랑그독 지방의 도시다. 데님은 바로 이곳에서 난 질긴 옷감이다. (142쪽)

• 마Ma와 몬Mon
인기 걸그룹 씨스타의 노래 중에 ‘마보이Ma Boy‘란 노래도 잘못된 표현이다. 프랑스어의 여성 소유격 Ma와 영어 Boy가 국제적으로 결합하면서 K-Pop 인기가요의 제목으로 재탄생했다. 문법적으로 따지면 매우 혼란스러운 제목이 아닐 수 없다. (163쪽)

: 이 부분은 나름 재미로 넣으신 것 같은데, 조금 부담스럽다고 해야하나…

• 벨로
바퀴가 직경 20인치 이하로 작은 자전거를 미니벨로라고 통칭하는데, 벨로velo는 프랑스어로 자전거를 뜻한다. (185쪽)

• 부케
프랑스어 ‘부케bouquet‘는 ‘꽃다발’을 의미한다. (201쪽)

• 샴페인
어떤 도시에서는 와인이나 고급 샴페인을 무료로 나눠주기도 한다. (207쪽)

: 원고에서도 “샴페인”이었을까요, 아니면 저자가 샹파뉴라고 쓴 것을 편집자가 샴페인이라고 고친 것일까요.

• 쿠데타
그러나 정작 쿠데타라는 용어의 본산지인 프랑스에서는 쿠데타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고 역사책에나 등장하는 용어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군부세력에 의한 불법적인 권력 장악을 표현할 때 ‘푸치putsch‘라는 독일어를 더 많이 쓴다. (241쪽)

• 외교 용어
그래서 지금도 외교 용어에는 프랑스어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외교에서 영어가 프랑스어를 밀어내고 새롭게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249쪽)

• 톨레랑스
톨레랑스는 동양적 의미의 너그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톨레랑스는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기초하고 있다. (…) 방어의 개념이 아니라 적극적 개념이다. 이견이나 차이에 대한 의도적 용인에서 끝나지 않고, 이견과 차이의 존중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의무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 그렇다면 우리사회는 톨레랑스가 있는가? 있다 없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톨레랑스가 주요한 사회적 가치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색깔론만 봐도 톨레랑스의 사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좀 우스개 소리지만 회사의 단체회식으로 중국집에 가서 다들 짜장면을 시켰는데 누군가 볶음밥을 시키면 눈치주는 분위기나 부장이 “자, 다들 먹고 싶은대로 시켜! 근데 나는 짜장면.” 이라고 하면 모두 짜장면을 시키는 것도 톨레랑스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톨레랑스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치열한 고민과 갈등을 거치면서 정착되는 성숙한 문화다. (254~255쪽)

 

읽은 기간: 2015년 2월 9일 ~ 2015년 2월 10일
정리 날짜: 2015년 2월 10일

Categories
책 읽고 씁니다

애플vs구글, 누가 ‘창세기’의 주인공으로 남을 것인가-下

google-play
(구글 플레이가 지원하는 다양한 콘텐츠 종류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 venturebeat.com)

 

(‘애플vs구글, 누가 ‘창세기’의 주인공으로 남을 것인가-上‘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플랫폼 제작과 관리에 성공한 애플

지난번 글을 마무리하면서 애플과 구글의 싸움은 한쪽이 완전히 패배하기 전까지 끝나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분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그건 이 싸움이 플랫폼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잡스는 안드로이드와의 싸움이 1980년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싸움과 비슷한 점을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애플 안팎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안드로이드와 아이폰은 플랫폼 전쟁 중이었다. 플랫폼 전쟁은 대개 승자독식 구조다. 승자는 시장점유율의 75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패자는 명맥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치는 처지가 된다.(193쪽)

애플은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PC) 시장의 플랫폼 싸움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인텔 연합에 완전히 자리를 내준 적이 있습니다. 실패에서도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했을 때, 애플은 이때 플랫폼 장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정보기술 업계에서 주도권 싸움의 간략하면서도 정확한 흐름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 글을 읽어보세요^^)

애플의 플랫폼 정책은 명확합니다. 철저하게 통제된 생태계를 조성하고 그 안에서 최고의 사용자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지요. 이건 애플 창립 이래 스티브잡스의 확고한 의지와 그에 합당한 능력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런 경향은 2003년 이후 더욱 공고해졌지요.  ‘아이튠즈 스토어’의 성공 덕분이었습니다.

(apple.com)

처음 소비자들에게 공개될 당시엔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로 시작한 이 서비스는 음악을 구매하고 듣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렸습니다.

그전까진 아무리 mp3플레이어가 있더라도 그 안에 넣을 음악 파일은 CD를 사서 리핑을 하거나 불법 다운로드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게 상식이었죠. 그런데 아이튠즈 뮤직스토어는 ‘노래 한 곡을 99센트에 산다’는 개념을 제시했고, 이것을 아주 성공적으로 시장에 정착시켰습니다.

mp3플레이어 아이팟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이 손쉬운 음악 구입 방법에 매료됐습니다. 듣고 싶은 음악을 한 곡씩 (불법이라는 찜찜함 없이) 다운받을 수 있는데, 그걸 누가 마다했을까요. ‘음원’ 구입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은 것도 아이튠즈 뮤직스토어 덕분이죠. 애플은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 출시 후 몇년만에 세계 음악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플랫폼 사업자로 완벽하게 자리잡았습니다.

이후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는 TV프로그램과 영화 판매까지 담당하면서 이름이 ‘아이튠즈 스토어’로 바뀌게 됩니다. 이름이 바뀌었지만 2014년 지금도 여전히 아이튠즈 스토어는 음원을 구입하는 가장 거대한 서비스 플랫폼입니다. (스포티파이 등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외하구요^^;)

아이튠즈 스토어라는 ‘플랫폼’의 힘을 받으면서 아이팟 시리즈가 잘 팔리기 시작했습니다(물론 아이팟 자체도 좋은 제품이죠). 아이팟 시리즈가 널리 보급되자 아이튠즈 스토어를 쓰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플랫폼이 전자제품 보급을 촉진하고, 촉진된 전자제품은 또 다시 플랫폼 확산에 힘을 더하는 선순환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입니다.

iPod Market Share
(stratechery.com)

결국 아이팟은 2004년 이후 미국 mp3플레이어 시장의 70% 이상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애플은 이 과정을 스마트폰 시장에서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아이폰을 위한 플랫폼으로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사고팔 수 있는 ‘앱스토어’를 개장한 것이지요. 앱스토어는 별도 프로그램이 아니라, 아이튠즈를 통해 제공됐습니다. 새로운 거래 장소인 앱스토어를 아이튠즈 스토어라는 기존 플랫폼에 얹어 제공하기, 당연한 결정이었겠죠.

(speak.com)

아이폰이라는 스마트폰 자체의 매력도 상당했지만, 아이폰의 사용성을 극대화한 것은 앱스토어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아이튠즈 스토어가 아이팟 확산에 기여했던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이폰 보급과 앱스토어 성장이 서로를 촉진하며 ‘스마트폰’ 하면 당연히 아이폰을 떠올리는 수준에 이르렀죠. 이렇게 애플은 아이튠즈 스토어를 통해 음원과 스마트폰 앱의 플랫폼을 꽉 쥐어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안드로이드의 무서운 성장

그런데 그 사이 안드로이드 진영이 성장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되겠죠.

2010년쯤이 되면 안드로이드는 놀라울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2008년 출시된 HTC의 G1이 ‘상용화된 첫 안드로이드폰’이라는 특징을 제외하곤 사용자들의 이목을 전혀 끌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었죠. 삼성전자가 갤럭시S를 출시해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도 2010년 하반기의 일입니다.

(삼성디스플레이 블로그)

당시 앤디 루빈은 한국에서 진행된 갤럭시 S 발표행사에 직접 찾아왔고, 국내 매체와의 인터뷰에선 “갤럭시S는 내가 아는 안드로이드폰 가운데 톱(TOP)“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갤럭시 S 외에도 안드로이드의 성과는 상당했습니다.

안드로이드는 사용자 수 700만명이라는 실적으로 2010년을 시작했다. 연말에는 사용자가 6700만명으로 증가한 데다 날마다 30만 명씩 늘어났다. 아직 안드로이드 자체로는 수익이 나지 않앗지만, 빠른 속도로 손익분기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안드로이드 덕분에 검색과 유튜브 등 다른 애플리케이션의 매출과 수익이 큰 폭으로 증가했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구글에 가입해 신용카드 정보를 입력했다. 안드로이드를 쓰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구글 검색 사용량과 광고 클릭 건수도 증가했다. (180쪽)

이런 안드로이드의 성장세가 애플은 무척 거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안드로이드를 도와주게 된 사건이 애플 내부에서 발생합니다. 바로 아이폰 4 유출과 이후 애플의 반응이었습니다.

2010년 4월, 애플 엔지니어가 아이폰4 시제품을  한 술집에 실수로 놓고 나갑니다. 술집 직원은 해당 제품을 IT전문 인터넷매체 기즈모도에 5000달러에 넘겼고, 기즈모도는 이것을 단독 보도했습니다.

(이게 2010년 4월 올라온 영상입니다. 아이폰4의 공식 공개일은 2010년 6월 7일이었죠)

아이폰4의 유출보도 이후 해당 지역 경찰은 기즈모도의 장물 불법 취득 여부를 두고 수사를 펼쳤습니다. 기자의 집을 수색하고 컴퓨터 장비를 압수하기도 했죠. 이때 잡스는 수사 진행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잡스는 마치 수사를 의뢰한 배후인물처럼 보이게 됐죠. 그런데 기즈모도의 기자는 기소되지 않고 컴퓨터도 그냥 돌려받았습니다.

기자들은 바로 앤디 루빈에게 달려가 이 사건에 대한 견해를 물었습니다. 루빈은 애플을 깎아내리면서 안드로이드를 돋보이게 할 만한 재치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루빈은 이렇게 말했죠. “그런 일이 있어서 누가 기사를 썼다면 좋아했을 겁니다. 개방하면 비밀이 줄어드는 법이죠”. 이건 대중을 향한 명백한 광고 메시지였습니다. ‘아이폰을 쓰면서 전제주의 국가의 국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건 아이폰을 만드는 회사가 폭군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드로이드를 써보세요.’ (187쪽) 게다가 아이폰4는 데스그립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더욱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됐지요.

(bgr.com)

안드로이드는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2011년 4월 기준,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들은 전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절반을 차지해 버립니다. 이후 안드로이드 진영에선 더욱 강력해진 갤럭시S2, HTC와 소니 등 다른 제조사에서도 나온 디자이어나 엑스페리아 시리즈 등 다양한 제품이 출시돼 사용자들의 구미를 자극했습니다.

아이패드, 가장 파괴적인 혁신의 등장

안드로이드의 확산 앞에서 애플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2012년이 되기 전까지 애플은 스마트폰 보급 수에서만 밀렸지, 안드로이드보다 여전히 훨씬 멋진 제품과 플랫폼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2010년 등장한 제품 덕분이었죠. 바로 아이패드였습니다.

처음 아이패드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애플의 혁신이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아이폰에서 액정 크기만 키운 제품 정도로 아이패드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비난이 쏟아졌고, 잡스는 상당히 기운이 빠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프레젠테이션 다음 날 저녁에 그는 아이작슨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지난 24시간 동안 메일이 800통 정도 왔어요. 거의 다 불평불만이었죠. USB코드가 없다. 이게 없다. 저게 없다. 개중에는 ‘엿 먹어라’ 같은 메일도 있었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하죠? 웬만해선 답장을 안 하는데, 이렇게 보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자란 걸 보면 부모님이 퍽도 좋아하시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이패드의 이름이 마음에 안 드나나 어쩐다나. 오늘은 약간 우울하네요. 충격을 좀 받았어요.(208쪽)

그러나  이건 아이패드가 너무나 새로운 제품이라 사람들이 미처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애플 직원들도 처음엔 아이패드의 진가를 알지 못했을 정도니까요. 아이패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엔지니어 제레미 와일드는 처음 아이패드를 접했을 때 “참 한심한 물건”이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그랬던 그가 막상 실제 제품을 잡아보고는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하나 만져보라고 주길래 그걸로 메일을 확인하고 이것저것 해봤더니…… 바로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그래. 이제 알았어. 아침마다 노트북으로 메일을 확인하는 건 딱 질색이야. 이건 노트북보다 훨씬 매력있어. 노트북은 너무 차갑잖아. 커피 한 잔 하면서 아이패드로 메일을 읽으면 훨씬 따뜻한 기분이야.'”(208쪽)

애플의 꽉 막힌 앱스토어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프로그래머 조 휴이트 역시 아이패드 공개 직후 자신의 블로그에 “아이패드는 내가 그동안 기대했던 바로 그 제품”이라며 극찬을 했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아이패드가 이렇게 대단하다는 것이었을까요?

그건 바로 애플이 제공하는 콘텐츠 플랫폼의 범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아이팟은 음악 소비 방식을 바꿨고 아이폰은 핸드폰의 개념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아이패드는 그뿐 아니라 책, 신문, 잡지 그리고 영화와 방송 콘텐츠의 소비 방식을 모두 바꿔버렸습니다. 아이패드를 공격하는 주요 이유였던  ‘액정만 크다’는 점은 사실 알고 보니 아이패드가 가장 파괴적인 혁신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cultofmac.com 1 2
cultofmac.com 1 2

이제 개발자, 콘텐츠 공급자들은 더 이상 자사의 앱이나 콘텐츠를 3.5인치나 4인치라는 작은 화면(안드로이드 폰이라고 해도 5인치대)에 쑤셔넣기 위해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이패드의 액정 크기는 책과 잡지를 읽기에 최적이었고, 영화나 드라마 감상하기에도 적절했습니다.

잡스가 희대의 천재인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콘텐츠의 소비 통로, 다시 말해 ‘미디어’를 장악하는 사람이 패권을 쥐게 된다는 것을 잡스는 일찍이 간파했습니다.

아이팟은 외양도 출중했지만 가장 큰 인기 요인은 음원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폰도 잡스가 앱스토어를 도입하기 전에는 매출이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아이패드가 대중화된 시기도 잡스가 미디어 대기업들을 설득해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는 책, 신문, 잡지, 영화, TV 프로그램이 무궁무진하게 공급되도록 한 이후였다.(252쪽)

잡스가 숨을 거둔 2011년 10월 즈음 사용자들은 아이패드로 거의 모든 콘텐츠를 읽거나 볼 수 있었다. 아이튠즈와 앱스토어에서 판매하는 책, 잡지, 신문, 영화, TV프로그램, 그릐고 케이블업체의 실시간 방송, 거기에 아마존, 넷플릭스, 훌루, HBO 등 여타 온라인 서비스 콘텐츠까지 더해져서 아이패드는 TV 이후 가장 중요한 미디어 소비기기가 되었다. 아이튠스로 수백 종의 잡지를 구독할 수 있었고, 아마존 킨들 앱이나 아이튠스 북스토어를 통해 백만 종 이상의 전자책을 즉시 다운로드할 수도 있었다. 거의 모든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에서 찾을 수 있었다. (255쪽)

이제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분야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출판 업계의 이권까지 얽힌 엄청난 시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전에 없던 움직임이었죠.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기능도 목표도 서로 닮아가는 중

애플 진영의 플랫폼 확대를 보면서 구글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애플의 앱스토어를 뒤따라 출시했던 안드로이드 마켓을 ‘구글 플레이’라는 서비스로 확대·개편했습니다. 애플리케이션뿐만이 아니라 도서, 음악, 영화, 게임 등 모든 콘텐츠를 취급하는 장터를 연 것입니다. 또한 부진했던 초반 모습을 털어내고, 상당히 쓸만한 태블릿 PC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아이패드로 촉발된 콘텐츠 소비 혁명에 안드로이드가 무사히 안착한 것이지요.

냉정히 말하자면 안드로이드는 꽤 오랜 기간 애플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바빴습니다. 앱 장터 출시도, 제대로된 스마트폰과 태블릿PC 출시도, 스마트폰 운영체제와 태블릿PC 운영체제의 안정적인 통합도 모두 애플보다 늦었습니다.

애플이 iOS7에서 안드로이드를 베낀 7가지 것들(businessinsider.com)
애플이 iOS7에서 안드로이드를 베낀 7가지 것들(businessinsider.com)

그런데 이젠 아이폰과 인드로이드 둘 다 일반적인 사용자들의 웬만한 요구는 모두 들어주고 남을 만큼 발전했습니다. 게다가 몇몇 부분에선 안드로이드가 아이폰을 앞서기도 했죠. 특히 iOS 7의 상태알림 바(notification bar)는 안드로이드를 참고(혹은 모방)했다는 게 국내외 모두의 여론입니다.

두 플랫폼의 지향성 자체도 거의 비슷해졌습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로 콘텐츠 소비를 위한 플랫폼을 장악한 애플과 구글은 이제 삶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나름 시장화에 성공한 스마트워치 제품군을 비롯, 한국 언론에서도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구글 글래스와 각종 웨어러블 디바이스는 모두 이런 미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두 회사의 치열한 전투입니다.

안드로이드와 아이폰이 경쟁하면서도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구글과 애플 두 회사의 목표가 같기 때문입니다. ‘플랫폼 장악’ 말입니다. 콘텐츠 유통 혁명에 이어 일상생활의 변화까지, 이 모든 것이 소비되는 핵심 통로를 쥐어잡기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이제 ‘아이폰이냐 안드로이드냐’의 문제는 단순히 스마트폰 하나만을 위한 고민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스마트폰을 선택하느냐는 곧 어느 플랫폼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두 회사는 건강관리 소프트웨어와 스마트카 시장에 이미 발을 들여놨습니다. 애플의 ‘헬스킷‘은 구글의 ‘구글 핏’이고, 구글의 ‘개방형 자동차 연합‘은 애플의 ‘카플레이‘입니다. 양측 회사는 모두 해당 시장의 생태계를 자사 플랫폼 위에 만들어두려고 싶어합니다.

아래 영상은 구글이 ‘안드로이드 L’ 발표와 함께 공개한 영상입니다만, 애플 역시 이와 같은 미래를 구상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활동과 콘텐츠를 여러 기계에서 소비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뤄지는 진정한 공간은 안드로이드 혹은 iOS가 되는 미래 말입니다.

아직까진 애플과 구글이 시장을 양분하고 있지만, 플랫폼이라는 것의 특성상 어느 순간 한 회사가 독점적 지위를 확립할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1990년대 PC 운영체제 시장에서 MS의 윈도 시리즈가 그랬고, 2010년대 SNS 시장에서 페이스북이 그랬던 것처럼요.

아이폰과 인드로이드, 당신은 어느쪽 교인이십니까

이제 이 글도 마무리할 때가 왔네요.

지금까지 살펴봤듯, 아이폰에서 시작된 ‘스마트’ 혁명은 이제 우리가 사는 방식의 기본적인 방식을 바꿔버릴 준비를 마쳤습니다. 눈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우리의 일상은 각종 기계를 통해 유기적으로 관리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상세히 소개한 책인  ‘도그파이트’의 서평을 쓰기 위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중, 기막힌 제목의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아이폰 혹은 안드로이드:당신의 종교를선택해야 할 순간“이라는 버지의 기사였습니다.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진영이 각각 자기만의 상태계를 공고히 하고, 상호간의 교류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내용의 분석이었습니다.

아이폰과 안드로이드를종교에 빗댄 그 표현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애플과(정확히 말해 스티브 잡스) 구글(정확히는 구글 검색)을 종교와 연관짓는 발상은 이미 넘쳐 흘렀었습니다. 그러나 두 회사의 스마트폰 제품 선택을 종교 선택이라는 차원으로 확실하게 못박은 것으로는 버지의 기사가 가장 깔끔하고 정확했습니다.

ab

좌측은 아이패드 공개 당시 이코노미스트의 표지 사진입니다. ‘잡스기(記):희망과 기망, 그리고 아이패드’라는 제목 아래 종교 지도자의 모습을 한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들고 서있습니다. 우측은 출처 불명의 사진입니다. 예수 그림 위에 “나는 모든 문제에 답해줄 수 없어. 구글에서 찾아봐”라는 말이 적혀있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일상 생활을 교회에 맞추듯, 아이폰 사용자와 안드로이드 사용자는 자신이 선택한 플랫폼에 일상 생활을 맞출 것입니다.

아이폰 알람으로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은 아이워치로 그날 날씨와 스케줄을 체크할 것이고, 카플레이가 적용된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겠지요. 일터에선 맥북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하고 나선 아이패드로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할 것입니다. 안드로이드 사용자도 마찬가지겠죠. 스마트폰 알람으로 아침에 눈을 뜨고, 구글글래스나 LG G워치 등으로 스케줄과 건강 관리를 할 것입니다. 게방형 자동차 연합의 결과물이 적용된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면서 그날의 중요 업무내용을 보고받고, 직장에선 크롬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한 뒤 결과물을 구글드라이브로 동료들과 공유할 것입니다.

애플과 구글은 스마트 디바이스 중심 사회의 창세기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두 회사 가운데 이 창세기의 주인공은 누가 될까요.

결과는 어쩌면 우리 손에 달려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안드로이드와 아이폰 중 어느쪽 교인이십니까.

Categories
책 읽고 씁니다

애플vs구글, 누가 ‘창세기’의 주인공으로 남을 것인가-上

Powered by Placeit
당신의 현재 모습은 어느 쪽인가요? (Powered by Placeit)

기독교 세계관에서 ‘창세기’는 아마 제일로 중요한 책일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 3절의 “빛이 있으라”라는 말은 기독교 신자가 아닌 제가 보더라도 이성과 감성 모두를 자극합니다. 마치 영화나 연극의 명대사처럼요. 물론 창세기가 기독교 세계관에서 각별한 것은 문장이 멋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기독교 관점에서 이 세상이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초기 과정을 거쳤는지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책은 여러모로 창세기와 비슷합니다. 창세기가 기독교 세계의 출발과 초기 역사를 기록했듯, 책 ‘도그파이트’는 애플과 구글의 모바일 운영체제와 스마트폰 기기의 출발과 초기 역사를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재편될 우리 삶이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스마트폰 세상의 창세기’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구글과 애플 중에서 누가 창세기의 진짜 주인공이 될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요.

아이폰, iOS와 안드로이드의 탄생

이 창세기는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책에는 애플과 구글에 관해 널리 알려진 사실뿐 아니라, 글쓴이 프레드 보겔스타인이 20여년간 IT분야 취재를 하며 쌓은 인맥과 취재력이 총동원된 뒷이야기도 풍성합니다.

아이폰이 처음부터 애플의 ‘차세대 혁신 제품’은 아니었다. 일단 잡스를 설득해야 했다. 2001년 아이팟을 출시한 순간부터 잡스와 최측근들 사이에서는 휴대폰 개발이 화제로 떠올랐다. 이유야 분명했다. 이메일, 통화, 음악 감상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기가 있는데, 이를 위해 굳이 두세 대의 기기를 가지고 다닐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35쪽)

(…)
그래서 사나흘 후에 스티브, 나, 조니, 사코먼이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아이폰 프로젝트의 서막을 연 거죠(43쪽)

한 드라마의 시놉시스라고 해도 괜찮을 만큼 읽는 재미가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애플이 지금처럼 거대 기업이 된 2014년의 눈으로 당시를 되돌아보니까 재밌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도그파이트’는 이렇게 멋진 부분만 소개하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죠? “뒷이야기도 풍성”하다구요.

아이폰의 문제점은 명약관화했다. 노래나 동영상을 일부분만 재생할 수 있을 뿐, 전체를 재생하려면 무조건 충돌이 일어났다. 이메일을 보낸 후 웹을 탐색하면 문제가 없지만 순서를 바꾸면 작동되지 않았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아이폰 팀은 어떤 작업을 어떤 순서로 하면 아이폰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엔지니어들의 용어로 ‘황금 경로’를 알아냈다.

그러나 잡스가 황금 경로를 따를 때조차도 말썽이 생겨서 막바지까지 온갖 우회로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뇬의 무선 송수신기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는 발표 당일에도 버그가 발견됐다. 

(…)잡스는 무대 위에서 통화할 계획이었는데, 그쪽으로는 손쓸 수 있는 방법이 훨씬 적었다. 그저 신호가 잘 잡히게 한 후에 기도나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폰 화면에 뜨는 무선 신호 알림 막대가 실제 강도와 상관없이 무조건 다섯 개가 되도록 사전에 프로그래밍했다. 잡스가 통화하는 몇 분 동안이야 무선 송수신기가 다운될 확률이 낮았지만, 전체 90분의 프레젠테이션 시간 중 다운될 확률은 높았기 때문이다. 

(…)잡스는 음악을 틀고, 전화를 받고, 통화 중 대기 상태에서 다른 전화를 받고, 사진을 찾아서 두 번째 통화 상대에게 메일로 보내고, 첫 번째 통화 상대를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하고, 다시 음악을 틀 계획이었다. “우리는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시연 제품의 메모리는 120메가바이트밖에 안 되는데, 앱들은 모두 다 미완성이라 메모리를 많이 잡아먹었거든요”(30~33쪽)

이런 어마무시한 산고 끝에 세상에 나온 제품이 바로 최초의 아이폰이었습니다. 이처럼 처절한, 가끔은 찌질한(ㅜㅜ) 노력 끝에 나온 것이 아이폰1 키노트였습니다. 영상 두 개를 소개할까 합니다. 한글 자막이 있는 ‘최초의 아이폰 소개 장면’과, 잡스가 “음악을 틀고 전화를 받고 ~ 다시 음악을 트는” 영상이요. 지금 당장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두 번째 영상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벌어진 일은 정말 마법같았죠. 세상이 변했습니다. 미국보다 한참 늦긴 했지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변했습니다.

S모 전자의 전지전능한 스마트폰 광고. 한때 우리나라에선 이게 스마트폰인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죠.

이제 구글과 안드로이드 얘기도 좀 해볼까요.

안드로이드의 탄생을 둘러싼 이야기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 독자들에겐 아무래도 안드로이드가 구글에 인수되기 전 삼성전자와 먼저 미팅을 했었다는 내용이 가장 흥미로울 것 같네요. (지금이야 안드로이드가 당연히 구글 제품으로 보이지만, 안드로이드도 처음엔 구글 외부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고, 나중에 구글에 인수됐습니다)  아래는 안드로이드를 처음 설계한 앤디 루빈의 말입니다.

우리 팀 전원, 나를 포함한 총 일곱 명이 회의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스무명의 중역이 들어와 탁자 반대편에 섰어요. 당시 우리는 동양 문화를 잘 몰랐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 있었죠. 그쪽 CEO가 들어오더군요. 그 사람이 앉으니까 그제야 다들 따라 앉는데 무슨 군사재판소 같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내가 프레젠테이션에 들어갔죠. 그 사람들을 벤처투자자라고 생각하고 안드로이드의 비전을 빠짐없이 설명했어요. 마침내 할 말을 다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조용한 겁니다. 침묵 그 자체였어요.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고 할까요. 그리고 낯선 언어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중역 한 명이 CEO와 나직이 무슨 말인가 주고받고는 말했습니다. “무슨 꿈같은 소립니까” 내가 전한 비전에 그들이 보인 반응은, 간단히 말하자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런 걸 만들겠다는 겁니까? 사람도 여섯 명밖에 없잖아요 약이라도 했습니까?”였어요 나는 비웃음을 뒤로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습니다. 구글에 인수되기 2주 전 일입니다. (인수 발표가 있고) 이튿날 그쪽 CEO를 보좌하는 중역이 전화를 해서는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당장 만납시다. (지난번에 서울에서) 우리에게 했던 아주 흥미로운 제안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75쪽)

한국인 독자에겐 여러모로 씁쓸한 일화입니다ㅜㅜ.

아무튼, 안드로이드 프로젝트는 저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뒤로하고 본격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구글 내부에서도 견제와 반발이 심했나봅니다. 상용화 가망성도 없어 보이는 이상한 프로젝트에 동료 개발자들이 차출되는 것을 구글 직원들은 못마땅하게 여겼더군요.

게다가 구글은 잡스가 위의 동영상처럼 아이폰이라는 신제품을 소개할 때까지만 해도 애플과 아주 사이가 좋은 회사였습니다. 둘에게는 마이크로소프트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으니까요. 데스크톱, 노트북, 모바일 세계에서 마이크로소프트라는 독점 거대악을 무찌를 연합군이라고나 할까요. 실제로 구글과 애플의 이사회와 사외고문 중에는 겹치는 사람까지 많았기에 누가 봐도 두 회사는 돈독한 사이였습니다. 단적인 예로 “장기간 애플의 이사로 있었으며 잡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빌 캠벨은 슈미트, 브린, 페이지의 최측근 고문”(132쪽)이었고,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구글 고문과 애플 이사직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두 회사의 관계는 구글이 모바일 세상의 잠재력을 꿰뚤어보고는 안드로이드 프로젝트에 힘을 쏟기 시작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안드로이드가 공개될 때만 해도 잡스는 구글의 세 리더(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미트)를 철썩같이 믿었던 것 같습니다.

잡스가 구글과 싸움을 시작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개인적인 데 있었던 것 같다. 잡스는 브린과 페이지를 친구로 여겼다. 잡스는 오래전부터 그들의 멘토였고, 세 사람이 주말이면 팰로앨토 시내를, 주중에는 애플 사옥을 함께 거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 잡스 밑에서 일한 중역은 이렇게 전했다. “잡스에게 듣자 하니, 그쪽(브린과 페이지)에 전화를 거니까 그냥 안드로이드를 대단찮게 여기더랍니다. 그때 내가 들은 말을 간단히 하자면 이렇습니다. ‘이 친구들이 나랑 어떤 사이인데, 지금 하는 일을 놓고 거짓말을 하겠어.'”(133쪽)

세기의 아이콘 잡스도 우정 앞에선 분별력이 약해졌었나봅니다. 달리 보면 브린과 페이지, 슈미트가 굉장히 얍삽(ㅡㅡㅋ)했다고 볼 수도 있구요. 안드로이드가 ‘별 거 아닌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던 잡스의 입장과 달리, 구글에선 모바일 시장을 휘어잡기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죠. 다만 모바일 전략의 중심이 처음부터 안드로이드였던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구글 내 안드로이드에 대한 반발도 심했구요. 자세한 사정은 책을 읽어보시면 되겠죠^^?

어찌됐든 안드로이드는 결국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이폰의 iOS와 무척 흡사한 모습으로요.

구글 공동설립자 세르게이 브린과 안드로이드 엔지니어링 디렉터 스티브 호로위츠가 안드로이드 탑재 휴대폰을 최초로 공개한 영상 캡처.
구글 공동설립자 세르게이 브린과 안드로이드 엔지니어링 디렉터 스티브 호로위츠가 안드로이드 탑재 휴대폰을 최초로 공개한 영상 캡처. (바로 가기)

잡스는 이걸 보고 무척 화를 냈다고 합니다. “동영상 봤어? 그 빌어먹을 게 죄다 우리가 하고 있는 걸 도용한 거잖아”(130쪽)라고 말할 정도였다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안드로이드는 저런 시연 동영상 단계를 넘어 실제 제품으로 소비자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t-mobile-g1-1_large_verge_medium_landscape
HTC가 제조한 T-mobile G1

처음 출시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인 G1은 사실 그렇게 대단한 제품이 아니었습니다. 딱 봐도 알 수 있듯 디자인도 별로였고 성능도 뛰어나지 못했거든요.

대신 이 제품으로 인해 확실하게 변한 것이 있었습니다. 애플과 구글은 이 제품 출시 즈음엔 대놓고 서로를 공격하는 는 관계로 들어섰습니다. 안드로이드가 별 대단하지 않은 프로젝트인것 처럼 말하던 구글은 2009년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태도를 바꾸고 공격적으로 안드로이드 확산에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벌어진 일은 우리 모두 알고 있죠…

http://rigvedawiki.net/r1/pds/d0128264_4ea3d702f4070.jpg

http://rigvedawiki.net/r1/pds/lee_goso.jpg
(출처: 엔하위키 ‘애플 삼성 소송전‘)
 다행히 최근 삼성과 애플이 미국 외 지역 법정분쟁을 끝내겠다는 발표를 하긴 했습니다.(관련 뉴스)

그렇지만 과연 안드로이드 진영과 애플의 싸움이 끝난 것일까요? 이 싸움은 한쪽이 완전히 패배하기 전까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싸움이 계속되어야만 하는 이유, 그리고 제가 왜 굳이 이 글에서 ‘창세기’라는 종교적 비유를 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편에서 마무리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애플vs구글, 누가 ‘창세기’의 주인공으로 남을 것인가-下‘로 이어집니다)

Categories
책 읽고 씁니다

인터넷 이용, 균형을 찾아야 한다 – 뇌를 위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이젠 ‘알기 쉬운 인터넷’ 종류의 책이 팔리지 않을 정도로 인터넷은 당연히 아는 것이 됐고, ‘스마트’ 운운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스마트폰과 무선인터넷은 삶의 기본 조건이 됐다. 그런데 이런 환경을 두고 이유 모를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대표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인터넷을 많이 하다 보면 집중력이 약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 둘째,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실제 생활에서보다 말을 막 하는 것 같다는 느낌.

이런 ‘느낌’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파헤치는 것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핵심이다. 느낌이나 막연한 생각 수준을 뛰어넘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무기는 뇌과학과 신경생리학이다. 그리고 우리 머릿속이 어떻게 바뀌었고, 그 변화가 왜 문제인지를 규명하기 위해 쓰인 보조 도구는 인류의 지(知)적 역사다. 책과 논문, 기사와 인터뷰 등을 포함한 380개 이상의 후주와 54권의 추천도서를 제시하면서 저자는 꼼꼼하게 주장을 펴쳐 나간다. 광범위한 조사, 훌륭한 논지 전개와 그에 이어지는 결론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순서대로 읽어 나가는 전통적 읽기란 곧 ‘깊이 읽기’다.

2. 깊이 읽기는 독자가 고요함을 찾도록 유도하고, 독자는 집중력을 향상시킨다.

3. 고요함과 집중을 통해 독자는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게 되고, 깊이 있는 사고는 ‘문화’를 가능케 한다. 그렇게 인류의 문화가 발전해 왔다.

4. 인간의 ‘공감’과 ‘열정’에도 고요함과 집중이 필요하다. 그런 고차원적 감정은 매우 세심한 정신적 과정이다.

5. 3에서 말한 문화와 4에서 말한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열정은 인간성의 핵심이다.

6. 인터넷은 ‘깊이 읽기’를 방해한다.

7. 그렇게 인터넷은 우리의 사고 방식과 인간의 문화, 감정의 폭에도 영향을 미친다.

8. “우리에게는 이 같은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우리가 무엇을 잃게 될 것인가에 대해 주의할 의무가 있다”(323쪽)
◊ 인터넷과 우리의 뇌

‘당장 인터넷을 끊자’는 식의 선동은 없다. 대신 문자 발명과 책, 그에 뒤따른 깊은 사고의 출현을 되짚으며 전체적인 지적 역사를 소개한다. 그리고 뇌과학과 신경생리학의 각종 연구 결과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인터넷이 우리 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물론 그 영향이란 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문화’와 타인에 대한 공감 등 ‘고차원적 감정’에 손상을 입히는 영향이다. (참고로 이 책은 매력적인 주장과 치밀한 조사, 훌륭한 짜임새 덕분에 2011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도 올랐었다)

잠깐, 혹시 저 위의 ‘2011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라는 링크를 클릭(터치)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했다면 왜 했는가. 하지 않았다면 왜 안했는가? 지금 나는 이것을 왜 묻는 것일까? 잠시 호모 사피엔스 종으로서 우리가 수만년에 걸쳐 만들어 놓은 두뇌의 작동 방식을 살펴보자.

우리의 친척뻘인 동물들의 뇌와 마찬가지로 자연 상태의 인간의 뇌는 산만하다. 우리는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최대한 알기 위해 시선을 계속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결과 관심이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는 성향이 있다.(99쪽)
우리의 관심이 신속하고 반사적으로 변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는 포획자가 갑자기 습격하거나 우리가 주변에 있는 식량을 못 보고 지나치는 것 같은 위기 상황을 최소화한다. (100쪽)

인간이 언제나 지금처럼 모든 동물과 자연 환경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식량이라면 모조리 먹어치워 에너지를 모으고, 혹시라도 맹수가 나타나면 곧장 도망쳐야 하는 게 인간의 삶이었다. 그런 시기를 겪으면서 우리 두뇌는 눈과 귀로 들어오는 미세한 환경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에 반응하도록 변화했다. 이런 두뇌의 움직임은 지금 같은 인터넷 시대에 아래 같은결과를 초래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러분의 뇌는 위에서 ‘2011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라는 하이퍼링크를 발견한 순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클릭(터치)할지’를 고민했다.

온라인에서는 수많은 찰나의 감각적 자극을 처리하며 링크들을 평가하고, 또 관련 내용을 검색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방해가 되는 문서나 다른 정보로부터 뇌를 분리시키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정신적 조정과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독자로서 우리가 링크와 마주칠 때마다 적어도 몇 분의 몇 초라도 멈추고 우리의 전전두엽 피질이 그것을 클릭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토록 해야 한다. 글을 읽는 데서 판단하는 것으로 우리의 정신적 자원의 방향이 전환되는 것을 감지조차 못할 수도 있지만(우리의 뇌는 활동이 빠르다) 이는 특히 자주 반복되었을 때 이해력과 기억력을 저해한다. (183쪽)

인용구에서 “지속적으로 정신적 조정과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는 부분이 중요하다. 책을 읽는 두뇌와 달리 인터넷 문서를 읽는 두뇌는, 본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는 전제 하에, 본문에서 뻗어나가는 하이퍼링크(예:’2011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와 그림 파일 혹은 광고부분에 계속해서 시선을 빼았긴다. 혹시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시선을 다른 곳에 빼앗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신다면, 윤지만님의 이 포스팅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현재 한국 인터넷 환경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언론사 홈페이지와 네이버 뉴스 페이지를 분석한 포스팅이다. (물론 여러분은 방금도 ‘윤지만님의 이 포스팅‘ 링크를 클릭할지 말지 고민했을 것이다. )

한편 인터넷 읽기는 단순히 “읽는 데서 판단하는 것”으로 바뀌는 수준의 결과만 초래하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이뤄지는 온라인 문서 읽기는 훑어보기 형식이 지배적이라는 점이 또 다른 문제다.

제이콥 닐슨의 실험 결과를 표현한 그림(그림을 클릭하시면 출처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제이콥 닐슨은 2006년 인터넷 사용자들에 대한 시선 추적 실허을 실시했다. (…) 대다수는 문서를 재빨리 훑었으며, 그들의 시선은 대략 알파벳 F의 형태를 띠며 페이지 아래를 향해 건너뛰는 식이었다. 사람들은 문서의 첫 번째 또는 세 번째 줄까지는 끝까지 살펴본다. 이후 그들의 시선은 약간 아래로 떨어지고, 몇 줄 더 가서 가운데 정도까지만 재빨리 살핀다. 결국 그들은 페이지의 왼쪽 아래쪽으로 옮겨 힐끔거린다. (200~201쪽)
그는 당시 “이용자들은 웹의 글을 어떤 방식으로 읽는가”라고 질문했었다. 답은 간결했다. “읽지 않는다”였다. (202쪽)

 

결국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읽기는 (1) 지속적인 클릭(터치) 판단의 개입때문에 읽기 과정 자체가 버거워지고, (2) 그런 판단 개입이 없더라도 F자 형식으로 문서를 빨리빨리 훑어보는 습관을 만들어낸다. ‘깊이 읽기’의 쇠락이다.

 

◊ 깊이 읽기의 중요성

이쯤 되면 누군가는 문제 제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깊이 읽기’가 뭐 그렇게 대단하냐는 문제 말이다. 사실 ‘깊이 읽기’는 인류의 지적 역사에서 매우 비정상적인 행위다. 그런데 이 비정상적인 행위야말로 인류가 지금 같은 문화를 쌓아올리는 출발점이었다.

문자 발명 전까지 인간은 음성 언어에 의존해서만 생각을 나눴다. 그런데 음성 언어로 이뤄지는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이 잠깐 딴 얘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무슨 얘기 하다가 여기까지 왔지?”라고 물어보는 장면, 누구나 겪어봤을 것이다.

대화만으로는 한 가지 주제를 꾸준히 파고들기가 힘들다. 기록은 차치하더라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의 특성상 한 가지 주제만을 치열하게 고민하기란 우리에게 매우 힘든 작업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준 게 문자의 발명이다. 그러나 문자 자체로는 완벽하지 않았다. 음성 언어의 호흡과 강세에 해당하는 띄어쓰기와문장부호가발명되고정착되기전까지사람들은단어가연이어적혀있는텍스트를읽어야만했다. 또한 음성 언어는 강세로 의미 전달이 가능한 탓에 같은 내용을 말하더라도 매번 어순이 달라질 수 있다. 초기 문자 생활에선 어순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 정형화되지 않았었다. 한글텍스트는그나마사정이낫지만로마자텍스트는정확한어순띄어쓰기와문장부호가없다면읽어내기가매우힘들다. Youarenowreadingthispassagethatiswritteninanawkwardmanner와 You are now reading this passage that is written in an awkward manner를 비교해 보자. 모두가 공유하는 어순, 띄어쓰기와 문장부호가 정착되기 전까지 위처럼 줄줄이 작성되던 글쓰기 방식을 ‘스크립투라 콘티누아'(Scriptura continua)라고 한다.

‘스크립투라 콘티누아’ 시절, 사람들은 글을 읽으면서 단어와 문장의 시작과 끝을 구별해내는 데 많은 정신 에너지를 쏟아야만 했다. 이것은 그 당시 독자들에게 “추가적인 인지적 부담”(96쪽)을 안겨줬다. 의미 분절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곧장 알아낼 수가 없으니 텍스트 따라가기에 급급했으며, 저자의 글을 오해하지 않고 읽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이런 과정에 두뇌 에너지가 총동원되는 상황에서, 저자의 의도를 궁금해한다거나 자기만의 사고방식을 심화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기원후 1000년 이후 띄어쓰기가 개발·보급되고, 15세기쯤이면 이탈리아 인쇄업자 알두스 마누티우스 덕분에 유럽에는 문장부호가 널리 보급된다. 그리고 인류 역사엔 본격적인 지성과 문화가 펼쳐졌다.

단어 사이에 띄어쓰기 공간을 두는 것은 문자를 해석하는 데 드는 인지적인 부담을 덜어주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빨리, 조용히 그리고 더 깊이 이해하며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했다. 젊은 독자들에 대한 최근의 연구가 밝혀냈듯 이를 위해서는 뇌 회로의 복잡한 변화가 요구된다. (98쪽)
뇌가 글을 해석하는 데 더 능수능란해지면서 과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까다로운 과정이었던 것이 기본적이며 자동적으로 행하는 과정이 되었고, 뇌는 남는 힘을 의미 해석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깊이 읽기”라고 부르는 방식도 가능해졌다. (99쪽)
비교적 방해받지 않고 하나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의 정신 발전 역사에 있어 불가사의하면서도 이례적인 일(100쪽)

여기에 기폭제가 된 것이 1445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이었다. ‘깊이 읽기’를 가능케 하는 책은 이제 금속활자 덕분에 값싸게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의 고민을 읽고 이해하고, 심도있게 고민한 뒤 자신만의 생각을 덧붙일 수 있게 됐다.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각과 경험을 상징이나 성직자의 말 속에 담긴 종교적인 계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경험과도 비교할 수 있게 했다. (…) 수도원과 상아탑에 갇혀 있던 문학적 사고는 이제 보편화되었다.(100쪽)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저자는 윌리엄 워즈워스, 랄프 왈도 에머슨, 제인 오스틴, 플로베르, 헨리 제임스, 제임스 조이스 등 위대한 작가들과 에드워드 기번, 데카르트, 로크, 칸트, 니체, 다윈, 아인슈타인, 케인스, 토머스 쿤, 레이첼 카슨 등 근현대 인류의 지성사를 장식한 위인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이 기념비적인 지적 성과물 중 그 어느 것도, 긴 글을 인쇄물 형태로 효율적으로 재생산하는 데서 촉발된 읽기와 쓰기, 또한 인식과 사고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했다.(117쪽)

‘깊이 읽기’는 곧 인류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핵심 동력이었다.

 

◊ 문제는 ‘가소성’이다.

그런데 인터넷은 앞서 살펴봤듯이 ‘깊이 읽기’를 근본적으로 방해한다. 특히 요즘같이 스마트폰이 보급된 시대에, 우리는 눈 뜨고 있는 내내 인터넷 방식의 글읽기를 계속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가 있으니 인간의 뇌가 말랑말랑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뇌의 ‘가소성'(plasticity)이다.

혼히들 성인이 되면 학습 능력이 떨어지고, 두뇌의 성장 자체가 멈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수십년에 걸친 뇌과학 연구 결과를 보면 성인이 되고 나서라도 인간의 뇌는 얼마든지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뇌가 언제나 유동적이며 환경과 행동의 작은 변화에도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결론(…).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의 유명한 신경 연구학자인 알바로 파스쿠알 레온은 “가소성은 일생을 거쳐 신경조직에서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상태”라고 말한다. 우리의 뇌는 경험과 행동에 반응해 끊임없이 변하고 개별 감각의 입력, 동작, 연관성, 보상 신호, 행동 계획, 인식의 변화 등에 따라 회로를 재조직한다. (56~57쪽)

가소성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맞춰 뇌가 변한다’는 것이다. 뉴런이나 시냅스 등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한 번 변한 뇌는 그만큼 해당하는 사고 방식을 수월하게 하고, 심지어는 “형성한 회로를 계속 작동시키고 싶어 하도록 우리를 조종”(61쪽)한다. 문제는 그 이면에 숨어있다.

일상적인 행동은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수행되는 반면 사용되지 않는 회로들은 가지치기당하는 식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연하다는 것이 곧 탄력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만큼이나 빨리 우리의 뉴런을 파고든다.(61쪽)

계속해서 간섭받고, F 방식으로 빠르게 훑어보기가 지배하는 인터넷 읽기 방식에 맞춰 우리 뇌의 회로가 재편될 수 있다는 뜻이다. 유연성이 없는 우리의 뇌는 어느새 인터넷 읽기 방식의 뇌로 변해 버린다. 종이에 인쇄된 글을 읽더라도, 예전처럼 차분히 읽을 수 없다. 이미 우리 뇌의 글 읽기 방식이 변해 버려서다. ‘인터넷을 많이 하면 산만해진다’는 느낌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다.

컴퓨터를 쓰지 않을 때도 두뇌의 활동이 예전같지 않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또 있다. 바로 사람들이 기억을 점점 인터넷에 “아웃소싱”(285쪽)하는 경향이다. 얼핏 생각하기엔 좋게 보이는 이 흐름은 사실 한 개인의 사고 능력에 치명적인 결점이 될 수 있다. 원래 우리의 뇌는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일 때마다 사고 능력을 더욱 예리하게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억하는 능력을 계속 방치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억을 확장할 때마다 지적 능력은 향상된다. 인터넷은 개인적인 기억에 편리하고 매력적인 보조물을 제공하지만 인터넷을 개인적인 기억의 대안물로 사용하면서 내부적인 강화 과정을 건너뛴다면 우리는 그 풍부함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을 텅 비게 하는 위험성을 안게 되는 것이다.(280쪽)

‘정보의 바다’가 되려 우리의 머릿속은 공허하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우리의 뇌는 인터넷에 적응하면 적응할수록 기억 능력이 약해진다.

우리가 온라인에 있을 때마다 받아들이게 되는 서로 다른 메시지의 유입은 (…) 전두엽이 한 가지 대상에만 집중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기억의 강화 과정은 아예 시작될 수도 없다. (283쪽)

이런 흐름의 종착점은 다음과 같다.

또 신경 통로의 가소성 덕분에 인터넷을 더 많이 사용할수록 우리의 뇌는 더욱 산만해지도록 훈련받는데, 이를 통해 정보를 매우 빨리, 효율적으로 처리하긴 하지만 지속적인 집중은 불가능하다. 이는 왜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컴퓨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조차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를 어려워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283쪽)

 

◊ 깊이 읽기는 사라질 것인가

한편 인터넷 문서의 대척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인쇄물조차 이젠 인터넷 문서와 비슷한 편집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많은 잡지들은 웹 사이트의 느낌과 모양을 따라 하거나 최소한 비슷하게 보이도록 편집하고 있다. 잡지들은 기사의 길이를 줄이고, 따로 내용을 요약해주는 글상자를 도입했고, 보기 쉬운 안내문과 사진 설명으로 페이지들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144쪽)

어쩌면 우리는 소수의 책과 신문을 제외하고, 웹문서를 닮은 문서만 읽으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깊이 읽기’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2010년’ 이후 태어난 아기들이 어른이 됐을 때인 2030~2040년쯤엔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문자와 문명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펼쳐보자면 말이다. 이미 우리는 아래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영상 속 만 1세 아이에게, 잡지는 그저 ‘터치에 반응하지 않는 아이패드’에 불과하다. 다음 영상도 중요하다.

아이패드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이 없는 종이라면, 아이는 그것을 터치하려고 하지 않는다.

손가락 끝을 갖다 대기만 하면 저절로 화면이 움직이는데, 이 신기한 물건을 두고 18개월 아기가 무슨 수로 호기심을 억제할 수 있을까.

 

◊ 지성의 후퇴와 함께 감성 능력도 약해진다

이 부분은 조금씩 생략하면서 통째 인용을 하겠다.

사우스캘리포니아대학교의 뇌와 창의력 연구소자인 안토니오 다마시오가 설명하듯이 (…) 고차원적인 감정은 느리게 타고난 신경 처리 과저에서 생겨난다 (…) 인간의 뇌가 물리적인 고통의 묘사에 빨리 반응하지만(누군가가 부상당한 것을 목격했을 때 당신의 뇌에 자리 잡은 원초적인 고통은 거의 즉각적으로 활성화된다) 심리적인 고통에 공감하는 더욱 세심한 정신적 과정은 훨씬 천천히 활성화됨을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뇌가 “신체의 직접적인 연관을 뛰어넘어 심리학적 도덕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일이 너무 빨리 일어난다면 타인의 심리적인 감정을 완전하게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인터넷이 우리의 도덕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일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이 우리의 살아 있는 통로의 경로를 바꾸고 사색 능력을 감소시키고, 우리의 생각뿐 아니라 감정의 깊이도 바꿔놓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 성급한 결론은 아닐 것이다. (318~319쪽)

결국 인터넷 사용은 지적 능력의 감퇴뿐 아니라 타인의 마음과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까지 약해지도록 유도한다는 암울한 결론이다.

 

◊ 균형 잡기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에필로그의 제목은 ‘포기할 수 없는 인간적인 요소들’이다. 여기서 저자는 “이 같은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우리가 무엇을 잃게 될 것인가에 대해 주의할 의무가 있다”(323쪽),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컴퓨터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공지능으로 변해버리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능이라는 것”(324쪽) 정도의 말을 한다.

미국에서 이 책이 처음 출간된 2011년에는 이런 주장을 본격적으로 담은 책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내 조사가 부족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이보다 앞서 같은 주제로 출판되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책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길 부탁드린다). 그래서일까. 책은 방대한 자료와 놀라운 발견에 비해 결론의 힘이 조금 약하다.

다행히 지난 2014년 4월 6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에는 이 책이 다루는 ‘지성’ 문제의 결론이 될 만한 글이 올라왔고, 같은달 25일에는 ‘감성’ 문제를 각성할 수 있을 만한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됐다.

울프는 자신의 두뇌가 ‘이중 읽기 능력’을 갖추도록 훈련하고 있다. 헤세의 책을 다음날 다시 집어들었고 스크린으로부터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이걸 꼭 해야 해’라고 제 자신에게 말하고, 모든 것을 치워버립니다”라며 “두번째 밤에도 세번째 밤에도 (책 읽기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2주는 걸린 것 같아요. 그런데 2주가 지나갈 때쯤이 되자 확실하게 예전의 (읽기 능력)을 되찾았고 책을 즐기면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Wolf is training her own brain to be bi-literate. She went back to the Hesse novel the next night, giving herself distance, both in time and space, from her screens.

“I put everything aside. I said to myself, ‘I have to do this,’ ” she said. “It was really hard the second night. It was really hard the third night. It took me two weeks, but by the end of the second week I had pretty much recovered myself so I could enjoy and finish the book.”

출처: Serious reading takes a hit from online scanning and skimming, researchers say

(안타깝게도 한국어 자막이 없다….)

가장 핵심을 추려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균형을 잡자”

이미 우리는 인터넷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조금만 노력하자. 책을 읽고, 종이 잡지를 구독하고, 일기를 종이 일기장에 쓰고,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는 손으로 편지를 쓰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인터넷 없이 살자는 게 아니다. 우리 뇌의 균형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인터넷이 우리 뇌에 무슨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결과들을 알고 싶다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또한 이 글에선 다루지 않았지만, 시계와 지도를 중심으로 ‘매체가 생각을 규정한다’는 논의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정말 고맙다는 말도 드리고 싶다.

Categories
책 읽고 씁니다

‘공부 논쟁’ – 내 집을 짓자

공부 논쟁(김대식, 김두식 저)
공부 논쟁(김대식, 김두식 저)

 

엘리트주의에 대한 평소의 생각과 서울대 폐지의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싶었다. 책의 제목도 ‘서울대 폐지론’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풀다보니 서울대 폐지에 대한 나의 생각이 아직 충분치 못했다. 대신에 평소 까대고 싶었던 주제들은 그런대로 전달된 듯하다. (285쪽, 에필로그)

 

일단 나도 이 책을 좀 “까대고” 시작할까 한다. 까댈 부분보다 칭찬할 부분이 많은 책이지만, 이 한 가지 까댈 점이 적잖이 아쉬워서다.

책을 읽는 내내 제목과 내용의 불협화음에 마음이 불편했었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에필로그에서야 그 불협화음의 정체가 밝혀졌다. 이 책의 제목과 뒤표지 문구를 보자. 제목은 ‘공부 논쟁’이고, 뒤표지에는 “한국사회 공부에 직격탄을 날린다”, “엘리트집단의 기득권 지키기 앞에서 평범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공부를 시켜야 할까? 괴짜 과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가 우리의 공부 풍토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며 뜨거운 논쟁을 벌인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제목과 뒤표지 문구는 모두 평범한 한국인 독자들이 ‘공부’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법한 내용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 내용이란 곧 중고등학생 시절 내신과 대입을 위해 했던 공부다.

그런데 이 책은 내신·대입 공부에 대해서는 아주 잠깐 다룬다. 실질적으로 다루는 것은 대입 공부가 아니라 대학원 진학 후 이뤄지는 공부다. 물론 공부는 대학원에서도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 공부에 직격탄”, “평범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공부를 시켜야 할까” 등의 표지에선 ‘대학원의 공부’를 인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이런 공부는 대개 ‘학문’이나 ‘학술’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결국 이 책의 제목은 마케팅에 지나치게 몰두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실제 책의 2·3장의 부분부분과 4~6장은 거의 다 대학원의 ‘학문’ 이야기인데, 포장을 하면서는 ‘공부’를 전면에 내세웠으니 말이다. 이 심증을 굳혀준 것이 앞서 인용한 김대식 교수의 발언이다. 원래 ‘서울대 폐지’를 중심으로 하는 대학사회 개혁을 말하고 싶었지만, 독자인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두 사람의 계획이 바뀐 것 같다. 그런 과정에서 출판사의 조정과 권유도 있었을 테고, 결국 책의 제목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너무나 매력적인) ‘공부 논쟁’으로 정해진 게 아닐까. 좀 더 내용에 충실한 제목과 홍보 멘트가 나오지 않은 것이 참 아쉽다.

까대기가 끝났다. 위에서 말했듯 이 책은 칭찬할 부분이 더 많은 책이다. 전반적으로 동생 김두식 교수는 진행자 역할을, 형 김두식 교수는 발언자 역할을 맡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사안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선보인다. 그리고 두 저자는 다양한 발언을 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놓치지 않는다. 책의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김대식 교수의 핵심 메시지는 ‘내 집 짓기’다.

 

연구 분야를 갖는다는 것은 빈 땅에 내 집을 짓는 것과 같아요. (71쪽)

아까 집 짓는다는 얘기를 했는데, 지금까지 저를 포함해서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해온 건 이런 거예요. 이집트 왕이 수만명을 동원해서 피라미드를 짓고 있어요. 어디 한군데 돌이 빠진 곳이 있으면 노예들이 잽싸게 뛰어가서 거기를 막아요. 그렇게 막으면 파라오가 그 노예에게 박수를 치고 상도 줘요. 그러나 피라미드가 완성되었을 때 그게 노예 것이 되나요? 파라오의 피라미드일 뿐이죠. (…) 노예들이 밖에 나와서 “내가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라고 해봐야 누구도 인정하지 않잖아요.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조그맣더라도, 1층짜리더라도 우리 집을 짓는 거예요.(75~77쪽)

지도교수가 만들어놓은 집을 과감하게 박차고 나와 자기 집을 짓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걸 하지 못해요.(141쪽)

평생 한번도 자기 집을 짓지 못하고 늘 지도교수 집의 한 귀퉁이만 지어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142쪽)

B교수가 한국에서 뭘 하겠어요? 연구비 받아서 외국의 A교수 연구공간을 그대로 베껴요. 똑같은 기계를 사고 똑같은 실험을 하면서 평생 지도교수의 ‘꼬붕’ 노릇만 해요.(164쪽)

 

대략 이런 식이다. 김대식 교수는 ‘자기 집’을 짓지 못하고 미국 등 외국 대학의 지도교수 영향력 아래에 안주하는 한국 대학의 교수들을 꽤 강하게 비판한다. 각종 사례가 등장하고, 때로는 ‘노예의 윤리’까지 거론한다. 잠깐 딴 얘기를 하자면… 이 블로그의 직전 글인 ‘대학 내 무분별한 영어 강의를 반대한다‘에서도 대충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저자를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덕분에 내 주장을 더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게 됐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교수들에게 요구하는 ‘자기 집 짓기’의 윤리는 김대식 교수의 인생관을 가로지르는 핵심축이다. 그리고 이 축에 여러 이야기가 덧붙여진 것이 이 책이라고 본다. 김두식 교수는 위에서도 말했듯 진행자 역할에 가깝고,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김대식 교수에게서 많이 나온다. 자기 집 짓기의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는 ‘내 목소리 내기’는 1장(형제 격돌, 엘리트주의에 칼을 대다)에서 반(反)엘리트주의의 기본 요소다.

 

내 생각이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선입견에 기초한 것이 아닌지 검토하고 혼자 결론을 내보아야죠. 결론을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요. 자기 생각을 말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 SNS가 일상화된 지금 오히려 더 생각이 획일화되고 생각의 독재가 퍼지고 있어요. – 대식
어떤 큰 사건이 터졌을 때 SNS를보면 믿을 만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분들이 적지 않아요. 신중함일 수 있지만 자기 생각을 만들 준비가 덜 된 것일 수도 있죠. 몇몇 오피니언 리더들이 입장을 밝히고 난 후에는 좀더 편하게 그 의견을 따라가요. 과연 자기 말의 어디까지가 자신의 생각인가. 중요한 질문입니다 – 두식 (49~50쪽)

 

또한 김대식 교수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엘리트주의가 지배하는 대학문화의 뿌리를 조선 시대 선비문화로 연결한다. 조선 선비의 최고 덕목은 고위 관직 진출이었고, 그 목표를 위해 필요한 것은 장원급제를 했는지와 좋은 서원을 나왔는지 여부였다. 이렇게 도출되는 결론이 바로 한국 사회에서 ‘장원급제 DNA’가 여전히 지배적이라는 것과 대학교 간판이 지나치게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장인 DNA’와 대학 입시제도 개혁은 직접 책을 읽으면서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나의 정리보다는 책을 직접 읽는 게 훨씬 재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 힌트를 약간 드리자면 ‘장인 DNA’는 가깝고도 먼 나라와 유럽의 한 중심 국가 이야기고, 대입제도 개선은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내용이다.

끝으로 두 교수의 관점이 드러나는 ‘흥미로운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씩을 소개하면서 마무리하겠다. 우선 김두식 교수가 경기고를 비롯한 비평준화 시절 ‘명문고’ 출신들이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이야기 도중 언급한 이야기.

심지어 진보진영이나 시민단체도 경기고를 비롯한 비평준화 시대 명문고 출신들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해요. (…) 우리 시대 대표적인 시민운동가라면 누가 뭐래도 지금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를 꼽을 겁니다. (…) 참여연대, 아름다운 재단, 희망제작소 등 박원순 변호사가 만든 단체들은 왜 모두 이 골목에 자리 잡았을까? 금방 답이 나오더라고요. 안국동 로터리 종로경찰서 앞에서 골목으로 좀 들어가면 정독도서관이 있잖아요. 옛날 경기고 자리에 세워진 도서관이죠. 박변호사님은 지금도 가끔 경기도 다니며 화동 언덕 오르내리던 이야기를 하세요. 우리 시대 대표적인 시민운동가에게도 경기고는 마음의 고향인 거죠. 2012년 박변호사님의 서울시장 선거캠프도 역시 안국빌딩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박변호사님께 직접 여쭤본 일은 없으나 마음의 고향에 대한 애착이 북촌을 그의 근거지로 삼게 만든 것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의 한계라기보다는 세대의 한계로 봐야 할 겁니다. (247~249쪽)

비평준화 명문고의 명맥은 이후 특목고와 자사고가 이어받는다. 아래는 김대식 교수가 ’15세에 인생을 결정하는 사회’의 연원을 추정하는 방식과 그에 대한 개선 제안이다.

 

특목고니 뭐니 해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시기에 인생이 결정되도록 하는 씨스템은 잘못된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빨리 인생이 결정 나는 씨스템을 갖게 됐을까요. 조선 시대 평균수명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와요. (…) 영유아 사망을 빼고 생각해도 평균수명은 35세 또는 40세 정도로 나올 거고요. 서울대 의대 황상익 교수도 35세 또는 그 이하였을 거라고 추정치를 내놓았더군요. (…)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35세인 상황에서 누군가가 15세에 장원급제해서 팔자를 고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갑신정변에 뛰어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나이가 20~34세입니다. 윤치호는 19세였어요. 인생의 정확히 절반쯤 되는 시기에 승부수를 던진 셈입니다. (…)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 남녀 합치면 81.4년이 나와요.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역산한다면 인생이 결정되는 시기를 40세 정도로 늦춰야 합니다. 그게 무리라면 최소한 대학교육이 끝나는 시점으로 미룰 수는 있지 않을까요? 학문 분야라면 대학원 시절에 보여준 능력을 중심으로 평가하면 됩니다. 그것만 해도 지금보다는 대략 10년쯤 삶에 여유를 주는 거예요. 수명이 연장된 만큼, 인생을 결정하는 시기도 변해야 해요.(257~258쪽)

 

내 세계관을 한 뼘 넓히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 부분이다. 얼마 전 만난 후배와 대화에서도 이 얘기를 써먹었다. 20대 중반에 인생의 열정이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이유로 평균수명의 급격환 변화를 들었다. “인류 종이 오랜 세월 동안 평균 수명 30세 언저리를 유지했으니, 10대 중반부터 20대 초중반까지 에너지가 넘치다가 그 후에 시들해지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지금이다. 갑자기 한 세기 만에 인류 전체 평균 수명이 말도 안 되게 늘어났다. 에너지의 절정과 쇠락 사이클은 여전히 수천수만년 이어온 인류 특유의 방식이 구동되는데, 살아야 할 세월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이건 축복이기도 하지만 재앙일 수도 있다” 정도의 얘기였던 것 같다.

이 글에는 소개하지 않았지만 번역 문제나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보수, 이과와 문과의 대학원 생활 차이, 아인슈타인이 아프리카에 태어났을 때를 가정하며 말한 인프라의 중요성 등 읽을거리가 충분한 책이다. 출퇴근길 오가며 읽었고, 덕분에 버스와 지하철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사족. 창비의 외래어 표기법은 봐도 봐도 적응이 잘 안 된다. 특히 243쪽의 ‘세런디퍼티'(serendipity)가 가장 어려웠다. 그래도 인용을 하면서는 ‘씨스템’ 등 창비의 외래어 표기법과 맞춤법, 띄어쓰기를 따랐다.

읽은 기간: 5월26일 ~ 31일 1차 독서.
6월4일까지 재독.
정리: 6월 7일

Categories
책 읽고 씁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신간 소개 기사는 눈에 띄는 대로 읽어보는 편이다. 지난 2013년이 저물어갈 때 이 책을 소개하는 기사를 접했다. 소개 첫 문장을 읽자마자 바로 흥미가 돋았다. 대학생들이 스스로 자행하는 학벌 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드는 책이었다.

“지방대는 저희 학교보다 대학서열이 낮아도 한참 낮은 곳인데, 제가 그쪽 학교의 학생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을 받는 건 말이 안 되죠!” (111쪽)
“입사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됐으면서 갑자기 정규직 하겠다고 떼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인 것 같습니다” (18쪽)

소재와 문제의식도 마음에 들었지만, 논문을 기반으로 한 책인지라 깔끔한 논리 전개도 돋보였다.

저자는 현재 대학생들이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능력과 공동체적 사고방식이 결여되고, 편견을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는 ‘괴물’이 되어버렸다고 진단한다.

괴물이 된 대학생은 대학 바깥 사회에 대해서도 차가운 시선을 보내지만, 대학 사회 내부에서도 서로에게 비수를 꽂는다.

현재 대학생들에게 ‘수능 점수’는 만인의 기준을 나누는 진리요 빛이고, 전국의 대학과 그 재학생은 ‘배치표’에 따라 철저하게 세분화된다. 그리고 극도로 세밀화된 이러한 ‘학력위계’에서 자신보다 한 층이라도 아래에 있는 대학과 그 재학생은 맘 놓고 무시해도 되는 존재로 전락한다.

널리 알려진 용어인 스카이서성한중경외시… 는 이제 상식일 뿐이다.

연세대는 서강대를, 서강대는 성균관대를, 성균관대는 중앙대를, 중앙대는 세종대를, 세종대는 서경대를, 서경대는 안양대를, 안양대는 성결대를 ‘무시’한다.(125쪽)

거기에 지잡대, 수시충, 편입충, 원세대, 조려대, 성수공, 경수공 등 갖가지 차별의 언어를 보태야 현 이십대가 대학 서열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해할 수 있다.

4년제는 다시 2년제를, 2년제는 또 같은 기준에 근거해서 자기들 내부를 쪼개고 줄세운다. 모두가 이렇게 같은 논리를 가지고 가해자 역할을 하며, 또 그래서 당연히 피해자 신분이 되는 상황에도 매우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셈이다.(125쪽)

이런 세계에서, 다른 대학이 쟐 되는 모습은 봐줄 래야 봐줄 수가 없다. 지난 4일 한 페이스북 유머 페이지성균관대의 위엄’이라는 제목을 달고 아래 사진을 올렸다.

성균관대 위엄 유머

이 아래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화여자대학교 학생 한 명(논의의 사실성을 위해 학교명을 밝힙니다)이 아래와 같은 댓글을 달았다.

진짜 몰라서 그러는데 ㅜㅜ 성대는 명륜 전문학교 전신 아닌가요? 그리고 성균관 국립교육기관의 부지를 구매한거고. 성균관 국립교육기관을 되물려받은 학교라면 왜 국립대가 아니라 사립대인거에요?..ㅠㅠ

아무 인연도 없는 다른 사람이 뭐라 뭐라 댓글을 달자, 위 학생은 다시 아래 댓글을 달았다.

감사합니당:) 성격을 계승한다는 점과 연관성이 높은 점은 이해가 가는데요 ㅜㅜ음.. 계승과 전신은 다른 얘기 아닌가요? 고려가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한것은 맞지만 전신은 아니듯요. 고려의 역사와 고구려의 역사가 별개이듯 말이에요~~

그리고 키보드 배틀이 시작됐다. 지금 이 글에서 성균관대의 600년 전통이 타당한지, 이화여대와 성균관대의 관계, 이화여대에 대한 사회적 시선 등은 전혀 언급하고 싶지 않다. 위에서 드러난 현상만 봤으면 좋겠다. 유머로라도 다른 대학이 좋게 소개되는 꼴을 참지 못하는 대학생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도 저렇게 정성을 들여 비아냥 섞인 댓글을 쓰면서까지.

글쓴이는 이런 사회 분위기의 원인으로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를 지목한다.

자기계발이 어떻게 한국 사회를 점령했는지, 얼마나 잠식했는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 짚어내는 과정은 읽는 재미가 상당하다. 물론 이 논지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읽기 불편할 따름이겠지만…

앞서 말한 ‘깔끔한 논리 전개’가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 자기계발의 3가지 특징을 제시되는데, 그 특징 각각은 순환적으로 맞물려 서로를 강화한다.

이런 상호 강화 관계는 현 이십대가 ‘학력위계주의’와 자기계발 논리를 맹신하면서 빚어내는 ‘와각지쟁'(蝸角之爭)을 묘사하는 과정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십대는 이렇게 자기통제형 자기계발에 부화뇌동하게 되었고, 그 자기계발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십대들이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학력위계주의에 대한 집착은 자기계발의 논리와 공식을 그대로 따른 결과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자기계발서를 찾는 동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 ‘사회적 문제’는 논의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184쪽)

‘사회적 문제’가 논의의 저편으로 사라진 사건을 불과 며칠 전에도 발생했다. 지난 15일 중앙대학교 총학생회는 “민주노총은 중앙대에서 철수해달라”고 요구했다. 자세한 내용은 노컷뉴스의 같은날 기사 ‘중앙대 손들어준 총학 “민주노총 나가라”‘를 통해 확인하길 바란다. (총학생회의 위 발언은 거센 역풍에 부닥치긴 했다. 기사1, 2)

이렇듯 책은 계속해서 현 이십대의 암울한 얼굴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는 학력위계주의가 묘사되는 부분은 ‘과잠의 사회학’ 등 현실감 넘치는 소재가 가득하다.

이쯤 되면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저자는 문제를 제기할 때 대안을 요구하는 태도가 문제 제기 자체를 봉쇄하는 효과가 있다고 지적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대안 제시보다, 문제를 문제로 바라보는 공감의 확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가 덧붙인 내용이 바로 현실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입증할 통계 자료다.

한국 대학들의 서열은 단지 수능점수만으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 경제적 지표로도 나뉘어진다. 각 대학에서 공시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학자금 대출현황을 확인해 보면 서울지역 주요 23개 대학의 학자금대출자 평균 비율이 재학생 대비 14.5%인데, 서울대와 연세대는 불과 5%대다. 하위 6개 대학은 상위 4개 대학보다 학자금대출자 비율이 11%가 더 높았다. (199쪽)

이렇게 문제는 대학교육을 받을 만한 경제력이 되느냐 마느냐를 이미 넘어서 있다. 대학등록금 자체도 비싼데다 어학연수나 각종 자격증 취득을 위한 사교육 그리고 고급문화를 즐길 수 있는 취향까지 이게 죄다 부모의 경제력에 달려 있는 일들인데 ‘기회는 공정했다. 그러나 너희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결과만 평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208-209쪽)

그리고…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통계조사를 덧붙이며 마무리로 넘어가겠다. 아래 도표는 대구 지역 가난한 동네 초등학교와 부자 동네 초등학생들이 각자 경제 배경에 따라 장래희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는 213쪽에 실렸으며, 원 데이터로 지목된 기사는 오마이뉴스의 ‘“장래희망은?”… 대구 초등학교 설문조사 ‘경악’‘이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 초등학생

책에서 갑자기 초등학생을 논의로 끌어들이는 바람에 처음엔 다소 튀는 느낌을 받았지만,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는 명제를 너무나 가슴 아프게 반박하는 자료였다. 그리고 이 현상은 이십대를 비롯한 한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실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분명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글쓴이가 학교 간 존재하는 일정한 차이와, 대학생들의 학력위계주의를 묘사하면서 다소 감정에 치우친 서술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누구나 자기계발을 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십대에게 ‘대학이름’이란 자신의 긴 인생에서 보면 한낱 최초의 자기계발 결과물일 뿐이다. (147쪽)

이런 강박감은 석준이의 ‘패션감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는 단지 ‘옷’에 불과한 학교 야구잠바를 입고 안 입는 문제에서도 학력위계주의 세대의 예민한 특징을 십분 보여준다. (159쪽)

한국 사회가 지독한 학력위계주의를 보이긴 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현대 문명을 받아들인 곳이라면 ‘대학이름’은 절대 ‘한낱’ 최초의 결과물일 수 없고, 대학 이름이 쓰인 옷은 ‘단지’ 옷일 수 없다. 이 소재들을 지나치게 격하할 때마다 다소 아쉬웠다.

아쉬운 점이 있기는 했지만, 무리한 대안 제기를 하지 않은 채 마무리해서 더욱 읽는 맛이 좋았던 책이다. 부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개인에 모든 책임을 덧씌우는 지금의 풍조에서 공동체의 책임과 역할이 분명 존재한다는 공감대 형성이 싹텄으면 좋겠다. 

 

읽은 기간: 2014.01.04 ~ 2014.01.08
정리 날짜:2014.01.19 (예약 발행일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