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인간의 흑역사

읽은 기간 : 2020년 8월 말 ~ 2020년 9월 첫째주

읽은 방법 : 리디셀렉트 + 크레마 카르타G

유인원이었음에도 나무에서 떨어져 사망하고, 그 덕분에 역사에 이름을 올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루시’에서부터 시작하는 인간 종의 온갖 실수와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소개하는 책. 

줄줄이 나열되는 사례는 그때그때 흥미롭긴 하지만 기억에 잘 남지는 않았다. 그런 개별적 사례보다도, 나에게는 내 직업에 관한 두 가지 깨달음으로 의미 있게 남을 저작이다.

첫째는 휴리스틱의 발견.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인지/심리 분야 용어라는 사실 정도만 대충 알고 있었으나, 이제 그것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대략 내가 이해하기로 휴리스틱이란 : 고차원적 인지능력을 바탕으로 세심한 추론과 인과관계 분석으로 의사결정 혹은 판단을 하는 게 아니라, 즉각적이고 본능적이며 특별한 고찰을 하지 않고 의사결정 혹은 판단을 하는 인간 두뇌의 작동방식이다. 휴리스틱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듯한데, 책에서는 두 가지 휴리스틱을 다룬다.

[1] “기준점 휴리스틱이란 뭔가를 결정할 때, 특히 사전 정보가 부족할수록 제일 처음 얻은 정보에 따라 결정이 크게 좌우되는 것을 가리킨다.” 

첫댓글이 중요하다는 것은 우스개소리가 아니었다ㅎㅎ. 책에는 집값 추측하기나 형량 판단하기라는 흥미로운 사례가 나온다.

[2] “한편 가용성 휴리스틱은, 우리가 모든 정보를 신중히 따지기보다는 무엇이든 제일 쉽게 떠오르는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장 최근의 사건이라든지 더 극적이고 기억에 남는 사실을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보려는 엄청난 편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할 만한 평범하고 시시한 정보는 그냥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발생 빈도 기준으로는 자동차 사고가 훨씬 위험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두려워하는 것은 비행기 사고라는 이야기는 많이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원인이 바로 가용성 휴리스틱이다. 자주 발생하다보니 기억에서 쉬이 잊혀지는 자동차 사고보다, 드물고 더 충격적인 비행기 사고에 대해 더 큰 공포를 느낀다는 것.

그런데 이 휴리스틱이 떠오를 때 이성으로 짓누르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답변은 휴리스틱만큼이나 흥미로운 두 가지 인지편향이 소개되어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책 ㄱㄱ.

둘째는 인터페이스라는 단어의 뜻에 대한 깨달음. 밥벌이 수단이 IT서비스 기획이다보니, 회사에서든 회사 밖에서든 늘 ‘인터페이스’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UI와 API에 모두 인터페이스라는 단어가 포함되니까.

그럼에도 어딘가모르게 찜찜한 구석이 많았다. ‘인터페이스가 대체 무슨 뜻일까?’하는 찜찜함. 그러다가, 아래의 사례를 읽고는 내 직업과 역할에 꼭 맞는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뜻’을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 독일군에서는 빠른 속도와 최첨단 기술로 중무장한 신형 잠수함 U-1206을 투입했다. 특히 최신식 화장실 설비를 갖춘 덕에 분뇨를 선내에 저장하지 않고 바다에 곧장 배출해 버릴 수 있었다. 문제는 그 화장실의 사용법이 너무 복잡했다는 것. 4월 14일, 화장실 물이 배출되지 않자 이런저런 조작을 시도하던 군 기술자는 엉뚱한 밸브를 돌렸고, 분뇨와 바닷물이 섞인 혼합물이 선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오수는 선실 구석구석 스며들었는데, 여기서 또 다시 불운 아닌 불운이 겹친다. 화장실 바닥에는 잠수함의 배터리가 위치해있었다는 것이다. 오수에 닿은 배터리는 유독가스가 분출되기 시작했고, 잠수함은 해수면위로 올라와야만 했다. 그리고 U-1206은 영국 공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게 되었다. 

이 사례를 두고 저자(와 번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건질 교훈은 ‘위급 상황에서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설계는 무척 중요하다’, ‘임무 수행에 필수적인 설비는 물리적으로 분리할 필요가 있다’ 등 중요한 것이 많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사례는 그냥 너무 웃겨서 넣어보았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용자 인터페이스’라는 표현에 주목했다. ‘이거, 내가 맨날 듣고 쓰는 UI라는 단어잖아?’ 이어서 깨달았다. ‘UI라는 거, 그냥 조작법이구나. 준비된 기능을 쓰는 사람이 쓰기 쉽게 만들어놓는 게 UI구나’. 

역사 책이었지만 뜬금 없이 IT기획자에게 이런저런 깨달음을 주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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