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슬프다’ 다시쓰기.

아래는 지난해 5월 교환학생으로 덴마크 오덴에에서 지내던 시절 예전 블로그과 대학 커뮤니티 게시판에 공개했던 글이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내가 하고 싶고 꿈꾸는 일만 바라보는 컴퓨터 공학도였다면’라는 부분이 참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을지라도 나는 분명 26살에 방황하고 있었을 것이다.

-2014년 12월 25일

그리고 글 말미에 있는 ‘단순히 또 하나의 취업 준비생’이라는 표현도 지금 보기엔 참 마음에 안 든다. 굉장히 건방진 표현이다. 기업에 취직하기, 먹고사는 문제 해결하기는 누가 뭐래도 중요한 일이며 경우에 따라선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 되기도 한다.

-2017년 4월 29일

 


 

꿈이라는 말, 소리내어 말해보면 정말 꿈 같다. 한 음절의 순 우리말 단어들이 대개 그렇듯, 꿈이라는 말도 너무나 즉각적으로 의미가 다가온다. 그리고 그 소리와 의미는 다시금 꿈결같이 사그라든다.
나는 1988년에 태어난 한국 나이 26살의 남자. 나의 꿈은 대체 무엇인지, 그 해답이 너무나 절실하다.

어릴적 깊게 관심 가지던 분야가 있었다. 바로 컴퓨터.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친구들 컴퓨터가 고장나면 내가 그 집에 찾아가 해결해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중학교 입학 선물도 CD-RW를 사달라고 했었구나… 당시엔 보통의 중고등학생들에게 CD 레코딩은 쉽게 접하지 못하는 대상이었다. 아무튼, 느려터진 8배속 CD-RW로 나는 친구들에게 음악 CD, 게임 CD를 만들어 팔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완전 불법 장사치였구나. 물론 그때나 가능했던 장사질이라는 점에서 추억이기도 하다. 중학교 3학년 무렵엔 학교 교무실과 교실 컴퓨터를 수리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컴퓨터 과목 선생님이 짜장면 한 그릇 시켜주고 하루 종일 같이 일하게 했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부려먹을 계획이면 맛있는 것 좀 사 주지 짜장면 한 그릇이 뭔가 싶다. 그래도 그 날은 뿌듯하기만 했다. 내 손으로 전교 컴퓨터의 절반을 다 손봤으니 말이다. 아, 요즘은 선생님들한테 노트북이 지급되니 이것도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게 컴퓨터 하드웨어를 끼고 사는 것이 좋았으니, 고등학교에 가면서는 당연히 이과생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고등학교에 가 보니… 수학이 너무나 어려웠다. 입시만을 강요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환경에서, 수학을 못 하는 학생이 이과에 가겠다는 만용을 부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문과를 선택했다. 문과를 선택하면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 말하는 대로, 그리고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흘깃 본 적 있는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이 되고 싶었다. 쉽게 말해서 취업을 잘 하고 싶었다. 문과에 가기로 한 이 결정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이었다. 사실 좋게 말해 변곡점이고, 솔직히 말해 정말 후회하는 부분이다.
아무튼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이 되고 싶었기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목표로 수험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목표하는 만큼 다 이루어내는 수험생이 얼마나 있으랴. 나도 목표했던 바에 살짝 못미치는 점수를 얻었다. 원서를 쓰는 기간,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성대’ 아래로는 쓰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점수에 맞추어’ 성균관대 인문과학계열에 원서를 넣고 합격했다. 원서를 넣을 때도, 그리고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도, 내 생각은 한결같았다.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해야지.’ 아참 오해하실까봐 한 마디 붙이자면, 고대에 대한 미련같은 건 전혀 없다. 나는 우리 학교를 정말 좋아한다 🙂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해 보았다. 학부 입학생으로서, 2학년에 올라갈 전공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처음으로 출시된 ‘내일로 티켓’을 사들고 7일간 우리나라 여행을 하며 고민을 계속했다. 결론은 영문학과. 이유는 쉬웠다. 취업에 가장 유리한 학과였기 때문이었다. 영문학과 진입에 성공했다. 이때까지도 그저 평범하게 공부좀 하다가,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해서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에, 그 해 학생회 대표를 하기도 했다. (영문과 계십니까? ^^…. )

그런데… 인생사 참 아이러니의 전시장이다. 영문과에서 만난 어떤 선배 덕분에 책 맛을 알아버렸다. 사실 처음으로 책을 진지하게 읽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더 이전의 일이지만, 내 삶 가까운 곳에서 ‘책 읽는 맛과 멋’을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학생회 일로 지쳐있었기에 학교 공부는 손을 놓았었지만, 틈틈이 ‘지적 허영’을 채우는 독서는 계속했다. 그리고… 그 때는 이명박 정부의 임기 첫 해였다. 광우병 파동이 터졌고, 사회 문제에 눈을 떴다. 내가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갖고 있다고 확실히 알게 된 것도 책과 함께 생각을 깊게 했던 덕분이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습관성 어때 탈골 때문에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 군복무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런저런 책을 더 많이 읽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점 ‘어긋나기’ 시작했다. 취업에 대한 생각이 거의 사라져버린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위대한 사람, 훌륭한 사람, 세상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당시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정서가 뜨거웠고, 국민참여당이 발족하던 시기였다. 나는 그 방향에 내 인생을 맡기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꿈을 밀고 나가기는 너무 두려웠다. 대학 신입생 시절 ‘전공진입 고민’을 하겠다며 떠났던 내일로 여행처럼, 이번에는 ‘인생 진로의 고민’을 하겠다며 해외로 발을 돌렸다. 호주에서 도시 노동자로 6개월, 유럽에서 배낭 여행자로 2개월을 보낸 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해답이 나왔다. 정치인이, 아니면 시민 운동가라도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리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한 번 애써보자고 결심했다.

일단 접근 가능한 일부터 시작해보라는 선배의 조언에 따라, 한 시민단체의 대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작은 규모였지만 나름의 강연회도 주최해보고, 역시 작은 규모였지만 사람들을 모아서 ‘토크 파티’라는 행사도 진행해보았다. 4월 11일 총선을 맞이하며 투표 독려 캠페인도 참 열심히 준비했었다. 여담으로, 그때 NHK에서 ‘한국 청년들의 정치 참여’를 주제로 취재를 왔었는데, 내가 프레젠테이션 하는 영상이 1초정도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못 타본 공중파를 일본에서 타게 되다니… 1초였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뿌듯했다.
총선이 끝난 후,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가 터져나왔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처음엔 ‘통합진보당 지지 철회’만을 외쳤다. 허나 시간이 갈 수록 눈에 들어온 것은, 나의 정치적 롤모델이었던 유시민의 얼굴이었다. 그의 안색은 피로감과 비루함으로 물들어갔다. 사태를 지켜보단 와중,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이 너무나 많겠구나.’ 당시 총선에서 낙선한 홍준표 현 경남도지사는 공직생활을 마감한다는 트위터 멘션에 ‘비아냥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많은 오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 자신으로 인해 빚어질 사건, 또한 그 사태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 펼쳐지리라는 예상. 나는 과연 ‘정치의 일상이 요구하는 비루함’을 견디고, 마음 속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냉정히 판단해본 결과, 나는 그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 날로 직업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은 사라졌다. 시민으로서, 공공선과 연대를 고민하는 시민으로서 우리 사회과 공동체에 관여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가장 긴 시간 고민했던 꿈이 사라지자, 당장 내 인생의 꿈이 다시 필요해졌다.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꿈’이 필요했다. 단순히 또 하나의 취업 준비생이 되기는 너무나 싫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것일까. 마침 청강하던 영어학 수업에서 길을 찾았다. 이전까지도 영어나 언어 일반에 대해 큰 관심이 있었는데, 그 수업에서 인생의 목표가 될 만한 내용을 발견했다. 학자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인생 항로에 또다른 변곡점이 생겼다. 복수전공을 신청할 마지막 기회를 내 손으로 포기하며, 영어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노동자가 아닌 학생으로서 하는 외국 생활이 어떠한지를 체험해보고 싶어서 4학년 1학기라는 시점에 맞추어 교환학생을 지원해 선발되었다.

학자로서의 내 가능성을 평가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이 땅에 온 지도 벌써 세 달 하고도 반이 지났다. 우리 학교 영문학과 수업에 비하면 정말 터무니없이 ‘많은’ 분량의 읽을거리 앞에서 매일매일 좌절하고 있다. 요즘은 에세이를 써야 하는 시험기간이다. 요 며칠간, 읽어도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영어 문장들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자연스럽게 또다시 내 꿈에 대한 회의감이 고개를 들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과연 나는 학자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일까?

너무 슬프다. 인생이라는 게 불확실성의 연속이고 아이러니의 전시장이라지만, 뭐가 되고 싶은지 하나 명확하게 찾지 못하는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하다. 그 시절, 꿈꾸던 삶을 쫓아 이과를 갔더라면 이렇게 오랜 시간 방황하지 않고 명확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밤이다. 성공적인 비즈니스맨, 사회 개혁을 위한 정치인 혹은 시민운동가, 학자… 모두 나에게 조금씩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진다. 고등학교 2학년 문과로 진학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진로 고민의 자유. 사르트르의 말처럼 자유는 나에게 선고(宣告)된 것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이 자유를 모르는, 내가 하고 싶고 꿈꾸는 일만 바라보는 컴퓨터 공학도였다면… 적어도 진로 때문에 이렇게까지 좌절하며 고민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또하나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 시절 내 삶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죄가 있나보다. 10대 중반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은 죄로 나는 스물 여섯이 되도록 대체 내가 무얼 원하는지, 무얼 하고 싶은지 단단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 괴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인터넷 글이라고 하기엔 너무 긴 글이고, 뚜렷한 주장 하나 없는 글이라 어느 누가 잘 읽어줄지도 걱정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은 당신이 나와 같은 처지라면… 방황하는 20대가 여기 또 한 명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 2013년 5월 19일 밤 12시 5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