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경향성’, ‘추측성’ 그리고 ‘비객관 보도’다.

피동형 기자들

1. 들풀넷 덕분에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읽어볼 글이 있습니다. 블로거 ‘들풀’님이 지난 2월 경주 마우나리조트 사고 당시 쓴 ‘AP는 하는데 왜 우린 못하나요‘라는 글입니다. 이미지까지 포함해 조금 길게 인용하겠습니다^^;

불행히도 한국의 보도 기사로 실리는 글들은 그 대부분이 저널리즘의 모범글로서 가치가 없다. 이렇게 써서는 안 된다는 사례로서는 훌륭하다. 그럼에도 기자 지망생이나 초년 기자들은 이렇게 잘못된 문장을 보고 흉내내며, 그런 표현을 더 자주 쓰는 것이 직업적 숙련의 증표인 양 착각한다. 그 결과, 당장 고쳐야 할 오류들을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답습하고 계승한다.

한국 언론이 관행적으로 쓰는 잘못된 표현으로 가장 대표적인 게 ‘관계자’와 ‘알려졌다’와 ‘추정된다’이다. 이 말들은 한국 기사에 너무나 흔하게 나와서, 어떤 글이라도 그 속에 이 단어들을 비벼 넣으면 즉시 기사문 같은 삘이 날 정도다. 하지만 이런 말은 잘못이다. 그냥 잘못이 아니라, 보도 윤리를 침해하고 언론의 역할을 의심케 하는 심대하고도 근본적인 잘못이 담긴 표현이다. 구체적으로 왜 잘못인지는 사례를 본 뒤에 덧붙이기로 하자.

1. <동아일보>에 실린 통신사(뉴스1) 기사다.

<span id='easy-footnote-1' class='easy-footnote-margin-adjust'></span><span class='easy-footnote'><a href='#easy-footnote-bottom-1' title='들풀넷의 사진파일이 삭제돼 따로 캡처 후 편집'><sup>1</sup></a></span>

(들풀넷의 사진파일이 삭제돼 따로 캡처 후 편집)

이 기사에 나오는 취재원은 셋이다. 그런데 실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는 ‘현장에 투입된 구조대 등’이고 둘은 ‘건축 전문가들’이며 셋은 ‘경주시 사고대책본부 관계자’다. 이들이 말한 것이 얼마나 신뢰 있는 정보인지도 의심되고, 만일 이들이 말한 정보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독자들은 누가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가 없다.(중략)6. 한국에서 벌어진 이 참사는 미국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다음은 <USA 투데이>에 실린 AP 기사이다.

들풀넷의 사진파일이 삭제돼 따로 캡처 후 편집

(들풀넷의 사진파일이 삭제돼 따로 캡처 )

한국 기사에서 폭설이 사고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한 것을, AP 기사는 부산소방서 소속 김인유가 말한 것으로 분명히 밝혔다. 피해자 현황은 행정안전부 재난 관리 책임자 정윤한으로부터, 사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부산외대 변기찬으로부터 들은 내용임을 밝혔다. 해당 시설에 대한 정보는 웹사이트에서 보았다고 밝혔다. 이것이 제대로 된 언론의 서술 방식이다.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외신이 더 정확하게 쓴다. 우리가 언론인을 가르치지 않거나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 언론이 가진 많은 문제와 그 뿌리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중략)

[덧붙임] (4월20일 00:45)

기자였던 김지영이 쓴 <피동형 기자들>은 기사 문장의 피동형 표현에 대해서 잘 다룬 책인 듯하다. ‘듯하다’라고 쓴 것은 물론 구하기 어려워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두와 목차만 보고도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겠다 싶다. 참고를 위해 적어둔다.

이렇게 긴 인용구를 넣어본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자세하고 길게 인용을 한 것은, 제가 ‘피동형 기자들’이라는 이번 책을 알게 된 계기가 바로 위의 글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계기일 뿐만 아니라 저의 글쓰기 습관을 엄청나게 바꾼 글입니다.

들풀님 덕분에 피동형으로 기사를 쓰는 것이 대체 왜 문제인지 깨달았고, ‘관계자’ 저널리즘의 해악을 목격했으며, 미국 언론에서 진정으로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덕분에 저는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꽤 오랫동안 피동형을 ‘근절’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모두 저 글과 들풀님 덕분이었죠.

2. 막상 이 책을 읽고 나니…’피동형, 무작정 피할 게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조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피동형을 무작정 피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요한 때라면 피동형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과 태도가 바뀐 건, 우선 책이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피동형 축출’을 내세우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주장하는 사람의 말하는 방식(글쓰는 방식)이 너무 일방통행이라면 그걸 듣는(읽는) 사람은 한 걸음 물러서게 마련이니까요.

저자 역시도 이 책에서 피동형 확산을 막을 수 없다는 ‘사용자 중심 언어관’을 소개하지요. (물론 저자는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구요)

피동형 사용에 대해서는 “우리말이 원래 능동형 중심의 언어라고 해서 지나치게 피동형을 기피하는 건 문제”라는 것이다.

(…) 이병갑은 “능동형이 발달한 우리말과 달리 일본말은 피동 표현이 발달해 대부분의 우리말 관련 서적이 피동형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일본식 어투에 대한 반발감, 언어 자존심의 발로일 수 있다는 것이다.

(…) 능동형 표현을 기피하려고 쓰는 피동형 표현에 대해서도,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경우라면 인정하자는 견해가 많다.

(‘피동형 기자들’ 142~3쪽)

피동형을 점점 많이 쓰는 것은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향입니다. 언어는 변하게 마련이라, ‘우리말은 원래 능동형 중심 언어’라고 천년만년 주장할 수는 없지요.

게다가 우리말의 피동형은 영어의 수동태와 명백하게 다른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영어에서 타동사만 수동태로 쓸 수 있는 것과 달리, 한국어에선 자동사도 수동태로 사용할 수 있지요. 아주 일상적으로요.

‘가다’와 ‘놀다’는 목적어를 취하는 경우가 없으니 둘 다 자동사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동사도 피동형으로 표현하는 때가 있다. “부모님을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마음만 그렇지 잘 가지지가 않아.” “한참 어린 애들하고 놀려니 잘 놀아지지가 않아.”

앞에서 예로 든 ‘먹어지다’와 방금 언급한 ‘가지다’ ‘놀아지다’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즉, 어떤 행동의 가능ㆍ불가능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어떤 행위의 가능성 여부를 표현할 때에는 피동사 대신 피동형을 쓰는 게 자연스런 한국어다.

영어 수동태와 우리말 피동문(김철호)

결국 한국어에는 피동형이 원래 그 나름의 의미를 갖고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작정 피해야만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3. 정말 피해야할 것은…

그럼 제가 ‘피동형’ 대신 더 중요한 문제로 본 것을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우리가 정말로 신경써야 할 문제는 바로  [경향성과 추측성을 동반한 비객관 보도]더군요.

피동형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사실을 그대로, 기자의 추측 없이,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자세라는 게 저의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피해야 할 것이 바로 피동형 표현들이구요.

가장 피해야 할 표현은 ‘예상된다’, ‘추정된다’, ‘판단된다’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말인 위와 같은 동사들을 피동형으로 쓴다면, 그건 기자가 자기 생각을 마치 객관적인 것 처럼 보이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제 처음 발생한 사건을 보도하면서 “논란이 예상됩니다”라고 쓰는 것이지요. 처음 발생해서 아직 아무도 논란을 벌이고 있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도 “논란이 예상된다”라고 쓰는 것은, 논란이 생길 것을 자신이 예상하고 쓰는 것이지요.

사회·역사·문화적 경험과 비교했을 때 논란이 일 것이라고 누구나 예측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아니라면, “논란이 예상된다”는 표현은 가급적 자제해야겠지요. 글 쓰는 사람이 ‘예상하는’ 것이면서, 마치 자기 의견이 아니고 객관적인 내용으로 독자가 받아들이게 만드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례로는 “~것으로 분석된다”, “~것으로 추정된다”가 있습니다. 분석은 누가 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글 쓰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객관적 진술인 척을 하면서 보도 문장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참 많지요.

네이버 뉴스에서 "것으로 분석한다"를 검색한 10월 19일 결과

네이버 뉴스에서 “것으로 분석한다”를 검색한 10월 19일 결과

“것으로 분석된다”를 검색한 네이버 뉴스 결과를 함께 보시면 되겠네요. 특히 정치·외교 뉴스에서 이 내용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로 아직까지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내용을 쓸 때 많이 동원하는 표현입니다. 으레 그러겠거니 싶은 내용을 다루면서 쓰는 문장이지요.

‘분석된다’는 사실 정치·외교적 문제가 얽혀 있어서 써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추정된다’만큼은 꼭 줄어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실체를 파악하고 나서 기사로 쓰는 것이 가장 좋을 텐데 말입니다…

4. 그래서 어떡하라고?

신랄하게 들어가자면 한도끝도 없을 문제가 바로 이 ‘한국언론의 피동형’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 그것에 대해 계속 파고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저도 때때로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있고, 또 한국 언론계를 둘러싼 환경이 모든 내용을 능동형으로 확실하게 쓰기는 조금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랄한 비판과 자세한 사례분석은 이 책 ‘피동형 기자들’에 맡겨두겠습니다.

다만 피동형을 줄이기 위한 대안만큼은 확실히 전하고 싶습니다.

피동형 피하기, 처음엔 정말 어렵습니다. 기사를 쓰든 연애편지를 쓰든, 문체라는 것은 워낙 ‘습관’ 문제입니다. 이전에 하던 버릇을 쉽게 고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피동형으로 문장을 쓰시던 분이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능동형으로 문장을 뜯어고치긴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제안하고 싶은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문장에서 ‘조사‘를 먼저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로 ‘이/가’를 ‘을/를’로 바꿔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피동형

중앙일보 배상복 기자의 ‘언어가 힘이다‘ 연재를 가져와 편집한 듯한 블로그  ‘Hunsong Media’에서

 

이런 것이죠.

“현지 진출 적극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에서 먼저 조사 ‘‘를 ‘‘로 바꾸면 문제 해결은 쉬워집니다.

한국어 사용자라면 자연스럽게 ‘을/를’이라는 목적격 조사 뒤에 타동사를 붙이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 “(현지 진출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제안할 내용은, ‘다른 표현’을 익히자는 것입니다.

역시 예를 들어야겠지요?

·각각 지지하는 입장인 것으로 조사됐다.

→ ~입장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전체 수익률을 낮춘 것으로 분석된다.

→ 전체 수익률을 낮추었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피동형 기자들’ 113쪽)

앞서 다루었던 ‘분석된다’가 여기도 나오네요. 그걸 피하기 위해서도 여기서 이 대응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

한국어 글쓰기에 관해 대화를 나누다가 피동형 문제가 나오면 “그렇다고 기자가 ‘조사했다’라고 쓸 수는 없잖아”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네 그렇게 쓸 수는 없지요. 그러나 한국어도 언어입니다. 무궁무진한 표현이 있으니 항상 ‘글발’을 갈고 닦아야 하지 않을까요.

5. 책은 읽을만 합니까

네. 괜찮은 책입니다. 후반에 저자가 다루는 일간지 분석 실태 보고서는 조금 지루합니다만 그 앞부분은 충분히 흥미롭고, 실용적이며, 놀랍습니다.

놀랍다니 무슨 말일까요? 이건 책을 직접 사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한국 언론이 피동형 문장을 본격적으로 많이 쓰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를 거치는 기간과 겹친다는 사실을 이 책은 말해줍니다.

피동형 확산의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는지는 책의 첫 50쪽만 읽으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광경은 조금 애달픕니다.

글 부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사서 읽어봄직 합니다. 기자분들에게는 두말할 것 없이 강추입니다:)

  1. 들풀넷의 사진파일이 삭제돼 따로 캡처 후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