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논쟁’ – 내 집을 짓자

공부 논쟁(김대식, 김두식 저)

공부 논쟁(김대식, 김두식 저)

 

엘리트주의에 대한 평소의 생각과 서울대 폐지의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싶었다. 책의 제목도 ‘서울대 폐지론’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풀다보니 서울대 폐지에 대한 나의 생각이 아직 충분치 못했다. 대신에 평소 까대고 싶었던 주제들은 그런대로 전달된 듯하다. (285쪽, 에필로그)

 

일단 나도 이 책을 좀 “까대고” 시작할까 한다. 까댈 부분보다 칭찬할 부분이 많은 책이지만, 이 한 가지 까댈 점이 적잖이 아쉬워서다.

책을 읽는 내내 제목과 내용의 불협화음에 마음이 불편했었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에필로그에서야 그 불협화음의 정체가 밝혀졌다. 이 책의 제목과 뒤표지 문구를 보자. 제목은 ‘공부 논쟁’이고, 뒤표지에는 “한국사회 공부에 직격탄을 날린다”, “엘리트집단의 기득권 지키기 앞에서 평범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공부를 시켜야 할까? 괴짜 과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가 우리의 공부 풍토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며 뜨거운 논쟁을 벌인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제목과 뒤표지 문구는 모두 평범한 한국인 독자들이 ‘공부’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법한 내용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 내용이란 곧 중고등학생 시절 내신과 대입을 위해 했던 공부다.

그런데 이 책은 내신·대입 공부에 대해서는 아주 잠깐 다룬다. 실질적으로 다루는 것은 대입 공부가 아니라 대학원 진학 후 이뤄지는 공부다. 물론 공부는 대학원에서도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 공부에 직격탄”, “평범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공부를 시켜야 할까” 등의 표지에선 ‘대학원의 공부’를 인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이런 공부는 대개 ‘학문’이나 ‘학술’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결국 이 책의 제목은 마케팅에 지나치게 몰두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실제 책의 2·3장의 부분부분과 4~6장은 거의 다 대학원의 ‘학문’ 이야기인데, 포장을 하면서는 ‘공부’를 전면에 내세웠으니 말이다. 이 심증을 굳혀준 것이 앞서 인용한 김대식 교수의 발언이다. 원래 ‘서울대 폐지’를 중심으로 하는 대학사회 개혁을 말하고 싶었지만, 독자인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두 사람의 계획이 바뀐 것 같다. 그런 과정에서 출판사의 조정과 권유도 있었을 테고, 결국 책의 제목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너무나 매력적인) ‘공부 논쟁’으로 정해진 게 아닐까. 좀 더 내용에 충실한 제목과 홍보 멘트가 나오지 않은 것이 참 아쉽다.

까대기가 끝났다. 위에서 말했듯 이 책은 칭찬할 부분이 더 많은 책이다. 전반적으로 동생 김두식 교수는 진행자 역할을, 형 김두식 교수는 발언자 역할을 맡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사안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선보인다. 그리고 두 저자는 다양한 발언을 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놓치지 않는다. 책의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김대식 교수의 핵심 메시지는 ‘내 집 짓기’다.

 

연구 분야를 갖는다는 것은 빈 땅에 내 집을 짓는 것과 같아요. (71쪽)

아까 집 짓는다는 얘기를 했는데, 지금까지 저를 포함해서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해온 건 이런 거예요. 이집트 왕이 수만명을 동원해서 피라미드를 짓고 있어요. 어디 한군데 돌이 빠진 곳이 있으면 노예들이 잽싸게 뛰어가서 거기를 막아요. 그렇게 막으면 파라오가 그 노예에게 박수를 치고 상도 줘요. 그러나 피라미드가 완성되었을 때 그게 노예 것이 되나요? 파라오의 피라미드일 뿐이죠. (…) 노예들이 밖에 나와서 “내가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라고 해봐야 누구도 인정하지 않잖아요.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조그맣더라도, 1층짜리더라도 우리 집을 짓는 거예요.(75~77쪽)

지도교수가 만들어놓은 집을 과감하게 박차고 나와 자기 집을 짓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걸 하지 못해요.(141쪽)

평생 한번도 자기 집을 짓지 못하고 늘 지도교수 집의 한 귀퉁이만 지어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142쪽)

B교수가 한국에서 뭘 하겠어요? 연구비 받아서 외국의 A교수 연구공간을 그대로 베껴요. 똑같은 기계를 사고 똑같은 실험을 하면서 평생 지도교수의 ‘꼬붕’ 노릇만 해요.(164쪽)

 

대략 이런 식이다. 김대식 교수는 ‘자기 집’을 짓지 못하고 미국 등 외국 대학의 지도교수 영향력 아래에 안주하는 한국 대학의 교수들을 꽤 강하게 비판한다. 각종 사례가 등장하고, 때로는 ‘노예의 윤리’까지 거론한다. 잠깐 딴 얘기를 하자면… 이 블로그의 직전 글인 ‘대학 내 무분별한 영어 강의를 반대한다‘에서도 대충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저자를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덕분에 내 주장을 더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게 됐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교수들에게 요구하는 ‘자기 집 짓기’의 윤리는 김대식 교수의 인생관을 가로지르는 핵심축이다. 그리고 이 축에 여러 이야기가 덧붙여진 것이 이 책이라고 본다. 김두식 교수는 위에서도 말했듯 진행자 역할에 가깝고,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김대식 교수에게서 많이 나온다. 자기 집 짓기의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는 ‘내 목소리 내기’는 1장(형제 격돌, 엘리트주의에 칼을 대다)에서 반(反)엘리트주의의 기본 요소다.

 

내 생각이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선입견에 기초한 것이 아닌지 검토하고 혼자 결론을 내보아야죠. 결론을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요. 자기 생각을 말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 SNS가 일상화된 지금 오히려 더 생각이 획일화되고 생각의 독재가 퍼지고 있어요. – 대식
어떤 큰 사건이 터졌을 때 SNS를보면 믿을 만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분들이 적지 않아요. 신중함일 수 있지만 자기 생각을 만들 준비가 덜 된 것일 수도 있죠. 몇몇 오피니언 리더들이 입장을 밝히고 난 후에는 좀더 편하게 그 의견을 따라가요. 과연 자기 말의 어디까지가 자신의 생각인가. 중요한 질문입니다 – 두식 (49~50쪽)

 

또한 김대식 교수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엘리트주의가 지배하는 대학문화의 뿌리를 조선 시대 선비문화로 연결한다. 조선 선비의 최고 덕목은 고위 관직 진출이었고, 그 목표를 위해 필요한 것은 장원급제를 했는지와 좋은 서원을 나왔는지 여부였다. 이렇게 도출되는 결론이 바로 한국 사회에서 ‘장원급제 DNA’가 여전히 지배적이라는 것과 대학교 간판이 지나치게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장인 DNA’와 대학 입시제도 개혁은 직접 책을 읽으면서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나의 정리보다는 책을 직접 읽는 게 훨씬 재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 힌트를 약간 드리자면 ‘장인 DNA’는 가깝고도 먼 나라와 유럽의 한 중심 국가 이야기고, 대입제도 개선은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내용이다.

끝으로 두 교수의 관점이 드러나는 ‘흥미로운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씩을 소개하면서 마무리하겠다. 우선 김두식 교수가 경기고를 비롯한 비평준화 시절 ‘명문고’ 출신들이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이야기 도중 언급한 이야기.

심지어 진보진영이나 시민단체도 경기고를 비롯한 비평준화 시대 명문고 출신들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해요. (…) 우리 시대 대표적인 시민운동가라면 누가 뭐래도 지금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를 꼽을 겁니다. (…) 참여연대, 아름다운 재단, 희망제작소 등 박원순 변호사가 만든 단체들은 왜 모두 이 골목에 자리 잡았을까? 금방 답이 나오더라고요. 안국동 로터리 종로경찰서 앞에서 골목으로 좀 들어가면 정독도서관이 있잖아요. 옛날 경기고 자리에 세워진 도서관이죠. 박변호사님은 지금도 가끔 경기도 다니며 화동 언덕 오르내리던 이야기를 하세요. 우리 시대 대표적인 시민운동가에게도 경기고는 마음의 고향인 거죠. 2012년 박변호사님의 서울시장 선거캠프도 역시 안국빌딩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박변호사님께 직접 여쭤본 일은 없으나 마음의 고향에 대한 애착이 북촌을 그의 근거지로 삼게 만든 것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의 한계라기보다는 세대의 한계로 봐야 할 겁니다. (247~249쪽)

비평준화 명문고의 명맥은 이후 특목고와 자사고가 이어받는다. 아래는 김대식 교수가 ’15세에 인생을 결정하는 사회’의 연원을 추정하는 방식과 그에 대한 개선 제안이다.

 

특목고니 뭐니 해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시기에 인생이 결정되도록 하는 씨스템은 잘못된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빨리 인생이 결정 나는 씨스템을 갖게 됐을까요. 조선 시대 평균수명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와요. (…) 영유아 사망을 빼고 생각해도 평균수명은 35세 또는 40세 정도로 나올 거고요. 서울대 의대 황상익 교수도 35세 또는 그 이하였을 거라고 추정치를 내놓았더군요. (…)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35세인 상황에서 누군가가 15세에 장원급제해서 팔자를 고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갑신정변에 뛰어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나이가 20~34세입니다. 윤치호는 19세였어요. 인생의 정확히 절반쯤 되는 시기에 승부수를 던진 셈입니다. (…)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 남녀 합치면 81.4년이 나와요.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역산한다면 인생이 결정되는 시기를 40세 정도로 늦춰야 합니다. 그게 무리라면 최소한 대학교육이 끝나는 시점으로 미룰 수는 있지 않을까요? 학문 분야라면 대학원 시절에 보여준 능력을 중심으로 평가하면 됩니다. 그것만 해도 지금보다는 대략 10년쯤 삶에 여유를 주는 거예요. 수명이 연장된 만큼, 인생을 결정하는 시기도 변해야 해요.(257~258쪽)

 

내 세계관을 한 뼘 넓히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 부분이다. 얼마 전 만난 후배와 대화에서도 이 얘기를 써먹었다. 20대 중반에 인생의 열정이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이유로 평균수명의 급격환 변화를 들었다. “인류 종이 오랜 세월 동안 평균 수명 30세 언저리를 유지했으니, 10대 중반부터 20대 초중반까지 에너지가 넘치다가 그 후에 시들해지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지금이다. 갑자기 한 세기 만에 인류 전체 평균 수명이 말도 안 되게 늘어났다. 에너지의 절정과 쇠락 사이클은 여전히 수천수만년 이어온 인류 특유의 방식이 구동되는데, 살아야 할 세월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이건 축복이기도 하지만 재앙일 수도 있다” 정도의 얘기였던 것 같다.

이 글에는 소개하지 않았지만 번역 문제나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보수, 이과와 문과의 대학원 생활 차이, 아인슈타인이 아프리카에 태어났을 때를 가정하며 말한 인프라의 중요성 등 읽을거리가 충분한 책이다. 출퇴근길 오가며 읽었고, 덕분에 버스와 지하철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사족. 창비의 외래어 표기법은 봐도 봐도 적응이 잘 안 된다. 특히 243쪽의 ‘세런디퍼티'(serendipity)가 가장 어려웠다. 그래도 인용을 하면서는 ‘씨스템’ 등 창비의 외래어 표기법과 맞춤법, 띄어쓰기를 따랐다.

읽은 기간: 5월26일 ~ 31일 1차 독서.
6월4일까지 재독.
정리: 6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