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내 무분별한 영어 강의를 반대한다

(*2012년 2학기 교내 영어 에세이 대회에 제출했던 것을 1년 반만에 한국어로 번역했다. 시간이 흐른 만큼 일부 내용이 보충, 편집됐다.)

 

매년 중앙일보가 발표하는 대학평가에서 영어강의 비율은 꽤 중요한 기준이다. 영문과 및 다른 외국어 전공학과를 제외한 전체 학부 전공과목 가운데 30% 이상이 영어로 이뤄질 경우 만점이 부여된다. 많은 사람들은 요즘처럼 영어가 ‘세계 공용어’인 세상에서 영어 강의는 필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무분별한 영어 강의에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도 교수도 모두 이득을 보지 못하는 것이 영어 강의다. 강의 언어로서 영어가 과연 효율적인지 한 번 고민해 봐야 할 때다.

한국이라는 환경에서 영어 강의는 교육을 위해 좋은 수단이 되지 못한다. 물론 몇몇 학과나 과목에서는 영어가 핵심일 수 있으며, 그런 경우엔 영어 수업이 필요할 것이다. 영어라는 언어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중요성을 과장하고, 모두에게 영어 사용을 강제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는 의문이 든다. 우선 학내 교강사 대다수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도를 온전히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 학생들에게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질문하길 꺼리는 한국 학생들은 영어 강의에선 질문을 극도로 자제한다. 결국 수업의 질과 효율성 모두 하락한다.

연세대학교의 한경희 책임연구원(공학교육혁신센터), 허준행 교수(토목환경공학과), 윤일구 교수(전기전자공학과)는 지난 2010년 발표한 ‘글로벌 공학인재 양성을 위한 영어강의의 역할과 과제‘에서 의미 있는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보고서에 의하면 교수와 학생 모두는 영어강의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이것의 가장 큰 이유는 “강의에 투입되는 노력과 시간이 큼에도 불구하고 강의 만족도는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한국어 수업에 비해 투자할 시간·노력과 수업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를 보자. 학부생은 영어 수업 준비에 2.63배의 시간과 노력을 더 쏟았지만 만족도는 70% 선에 그쳤다. 같은 조사 항목에서 대학원생은 1.91배·77%, 교수는 2.11배·74%의 결과를 보였다.

이런 현상은 내가 학부 시절 들었던 수업에서도 일어났다. 참고로 나는 영어영문학과 학생이다. 우리 학과 학생들은 전공이 전공인지라 수업 준비 과정에서 느끼는 중압감은 다른 학과 학생들에 비해 가벼운 편이다. 문제는 수업 시간이다. 뭔가 불분명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나와도, 학생들은 질문하기를 주저한다. 가끔 주어지는 조별 토의 시간에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해 답답해하는 장면들이 속출한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학생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다. 이때 의견 교환의 언어는 물론 한국어다.

영어 강의에 발목 잡히는 것은 학생뿐만이 아니다. 2009년 교수신문 기사에 의하면 현직 교수들은 ‘번역서+한국어’강의보다 ‘원서+영어’ 강의에서 수업 진도가 1/3수준으로 떨어진다고 공감했다. 또한 지난해에는 카이스트 교수들이 학내 전면 영어 강의 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관련 기사 1·기사2) 박승오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강의는 교수와 학생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라며 “대다수의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을 영어로 강의한다고 하면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강의에 집중할 수 없고, 동기 부여가 망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역학’ 교과목을 예로 든다. 기초 응용수학 지식이 필요한 학문임에도, 학생들은 강의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 자신의 영어 실력을 탓하거나 영어를 잘하게 되면 해당 과목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겪었던 한국인 교수의 영어 강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꽤 많은 영어 강의를 수강했지만, 너무나 자주 들었던 말은 ‘You know’, ‘kind of’, ‘sort of’ 등의 표현이었다. 아마 다른 학과 사정은 더 심각하리라 생각한다. 나는 지금 교수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만은 분명히 하고 싶다. 대다수의 교수들 역시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어 모국어 화자들이다.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삼는 사람이 영어 강의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탓해야 할 것은 이상하게 돌아가는 ‘제도’와 영어 강의를 둘러싼 ‘미신’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수업시간에 쓰면 영어 실력이 저절로 향상될 것이다’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 마치 2000년대 초반 한국을 강타했던 영어 공용어화 논리와 비슷하다.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우리의 영어 실력을 키워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한다면 수월하게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라는 당시의 목소리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함께하기 위해 대학의 영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영어로 강의를 하면 될 것이다”라는 메아리가 되어 울리고 있다.

이론이나 상상 속에서라면, 영어를 수업 시간에 많이 쓸수록 학생과 교수의 영어 실력은 분명 향상된다. 하지만 그런 의견은 한국이 철저한 한국어 중심 언어공동체라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순진무구한 기대에 불과하다. 국민 절대다수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국어로 생활하고, 거의 대부분의 국내 정보는 한국어를 타고 흐른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생활에서 쓰는 사람은, 자신의 일상생활 반경을 좁디좁은 ‘영어 화자들 속’에 한정하게 될 것이다.

또한 ‘영어 학습’과 ‘영어 이용’이 다른 층위에 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자신이 익힌 외국어의 수준만큼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 government, lawmaker, policy 등의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정치에 관해 영어로 얘기하기 힘들 테다. as well as, rather than, not so much A as B 등의 표현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많은 개별 단어를 알고 있어도 능숙하게 자기 생각을 펼치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표현할 만큼의 영어 실력을 미리 쌓았는가이다.

몇 해 전 수강했던 영어학 과목에서, 하루 수업의 핵심은 ‘표준편차’였다. 한국어로 설명했더라면 표준편차는 이해하기에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들 고등학교에서 배웠을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당 교수님은 ‘standard deviation’을 영어로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셨다. 학생들도 ‘standard deviation’이 무엇인지 몰라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날 강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에겐 통계학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고 이해할 만한 영어 실력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어로 된 통계학’을 몰랐다.

영어 강의가 낳은 것은 영어 실력도 잡고 전공 지식도 확충하는 일석이조가 아니라, 오해와 시간 낭비의 악순환이었다. ‘학술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영어 실력 자체가 그에 맞는 수준으로 먼저 보장돼야 한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무턱대고 영어 강의를 한다고 해서 영어 실력이 대학 수업에 걸맞은 수준으로 저절로 향상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런 현재의 흐름 외에, 역사적 사실도 한 번 생각해 보자. 조선 이래 한반도에서 전 세계가 공유하는 지식이나 철학이 만들어졌는가 생각해보면 답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뛰어난 학자들이 분명 존재했지만, 그들이 당대 학문의 국제 흐름을 주도했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중국이 정신적, 학술적 유산을 한자로 차곡차곡 기록하는 동안, 우리는 한자를 차용해 그들을 따라가기 바빴다. 심지어는 한국어에 가장 알맞은 문자인 한글 창제 이후에도 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따라잡는 데만도 여력이 모자랐다. 해방 이후 영어가 대세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60년째 우리의 아버지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따라가기 바쁘다.

이것은 단순히 영어(혹은 다른 외국어)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영어 못하기로는 한국 못지않은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19명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수상 실적이 해당 국가의 학문 독창성과 국제 흐름 선도 여부를 100% 나타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대략적인 위상이나 분위기는 반영하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영어 실력이 아니라, 독창적인 사고방식과 독자적 철학이다. 극단적인 사례로는 일본의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수가 있다.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노벨상 시상식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영어로 된 물리 용어는 안다. 그러나 영어로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물리는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극단적 사례를 제외하더라도, 영어보다는 자신의 본질적 실력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개인의 실력과 독창성은 모국어와 함께 더욱 효과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의 수많은 사례가 증명한다. 칸트는 3대 비판서를 모두 모국어인 독일어로 저술했다. 이것은 독일어로 쓰인 최초의 철학서였다. 칸트는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남았다.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도 자기 모국어로 작품 활동을 했다. 결과적으로 영어는 독특한 생기를 부여받았고 셰익스피어는 영원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전자기학의 아버지’ 마이클 패러데이는 제본소 견습공으로 일하면서 과학 서적을 탐독했다. 제본소에 들어온 우수한 책들이 “영어로 쓰인” 덕분이었다. 그는 훗날 ‘전자기유도의 법칙’을 알아냈다. 오늘날 대부분의 발전소가 기본적으로 활용하는 법칙이다. 이렇게 칸트, 셰익스피어, 패러데이는 각자 모국어를 통해 뛰어난 성과를 일궈냈다.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영어 강의가 적합한지 아닌지를 묻는 목소리 자체가 매우 작다. 그리고 어쩌면 미래의 한국은 지금까지의 한국과 다를지도 모른다. 영어가 모두에게 친숙하고 쉬운 언어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통해 독창적인 학문 성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미래 세계에서는 영어만큼이나 중국어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관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독창성을 위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독창적인 것은 모국어를 통해 더 쉽게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언어를 배우는 일과 그 언어를 학술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다. 적정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설익은 영어는 학문을 발전시키기는커녕 어이없는 해프닝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 창의성, 독창성, 그리고 우리의 학문 정체성 등을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때다. 얼마나 많은 강의가 영어로 진행되는가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참고 문헌·기사·자료>

글로벌 공학인재 양성을 위한 영어강의의 역할과 과제 (한경희, 허준행, 윤일구)

‘무늬만’ 강의 늘어 … 교육 質 제고 시급하다 (교수신문 최성욱 기자)

“국제화가 아니라 미국화” KAIST 영어강의 논란 (헬로디디 임은희 기자)

KAIST 교수들 “영어강의는 국제화 아닌 미국화” (연합뉴스 박주영 기자)

노벨상 수상 마스카와 교수와 영어 (서울신문 박홍기 기자)

일본 노벨상 19명, 과학분야만 16명…비결은? (SBS 유영수 기자)

백종현 교수 “칸트와 함께 ‘이성의 한계’ 너머 희망 얘기할 때” (동아일보 권재현 기자)

“식민지도 아닌데 왜 영어로 수업하나” (한겨레21 이정훈 기자)

EBS 클립뱅크 : 최고의 실험 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