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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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분량(416쪽)에 익숙한 주제, 신문 칼럼 모음집이라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다 읽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린 책이다. 지난번에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에서 밝혔듯 고종석의 책은 네 번째 읽는다. 게다가 전에 읽은 책에는 이번 책과 상당 부분 소재가 겹치는 ‘국어의 풍경들’과 ‘감염된 언어’가 포함돼 있다. 그런데도 독서에 한 달이나 걸렸다는 사실에 내 자신이 참 한심스럽다. 아마도 3월부터 최근까지 전개된 신변의 변화와 정신의 번잡함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독후감을 써내고 났을 때 내 마음도 조금은 더 정돈된다면 좋겠다.

간단한 소개를 하자면 ‘말들의 풍경’은 지난 2006년 3월부터 2007년 2월까지 고종석이 ‘한국일보’에 연재한 글을 엮은 단행본으로 초판은 2007년 출판됐다. 이번 개정판에는 초판엔 없던 체계가 부여됐다. 언어 현상에 관한 글을 묶은 1부 ‘말들의 풍경’과 텍스트나 저자에 관한 논평이 모인 2부 ‘말들의 산책’이 그것이다. 또한 2009년 한국일보에 8회 연재되고 “허무하게” 끝나 버린 ‘말들의 모험‘이 3부로 덧대어졌다. ‘말들의 모험’이 왜 “허무하게” 끝났는지는 여러분이 직접 확인해주길 바란다. (길지 않은 분량이니 일독을 권하는 것이다.)

신문 지면에 실렸던 글을 모은 탓에 이 책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없다. 읽고 나서 뚜렷한 메시지 하나를 원하는 독자라면 읽고 난 뒷맛이 개운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책 속 모든 글이 조금씩 발을 걸치고 있는 소재는 있다. 바로 ‘언어’다. 그중에서도 3부에 실린 언어학 글과 1부의 몇몇 글을 제외하면 가장 중심이 되는 소재는 한국어다.

책은 한국어 이 구석 저 모퉁이의 단면을 살피며 독자들에게 그 속살을 보여준다. 때로는 ‘남과 북, 그 헌법의 풍경‘, ‘외래어와의 성전‘ 등 딱딱한 주제를 다루다가도 ‘누리망의 어떤 풍경‘, ‘광고 카피‘처럼 누구에게나 읽기 편한 주제를 다루면서 독자에게 한국어의 다채로운 모습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공교육의 부실함 탓에 제 모국어에 관해 깊이 성찰해본 적이 별로 없을 대부분의 독자에게 이 책은 자신의 언어생활을 되돌아보고 한국어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호사”스러운 기회다. 이런 기회는 ‘새로운 사회방언?‘, ‘우리말 안의 그들 말‘, ‘한글,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 ‘‘국어’라는 이름’,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 ‘모호한, 그리고 물렁물렁한‘, ‘예절의 언어적 돋을새김‘, ‘부르는 말과 가리키는 말’, ‘합치고 뭉개고‘, ‘한국어의 미래‘ 등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정작 진정 주의 깊게 읽은 것은 방금 언급한 1부의 글들이 아니라, 2부에 엮인 한국어 텍스트와 그 저자들에 관한 논평이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탓에 정신적 교양의 상당 부분을 서양 전통에 의지했던 나에게, 한국 현대사의 정신세계를 장식했던 지식인들을 알게 된 것은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몇몇 저술가, 정치인, 작가 외에도 내 정신의 빈곤을 채워줄 같은 한국인 선배를 더 알게 됐다.

가장 인상적인 글은 다섯 편이다. 이재현의 가상인터뷰를 다룬 ‘언어의 부력‘, 문학비평가 김현과 그의 저작을 다룬 ‘김현, 또는 마음의 풍경화‘, 그리고 저널리스트 3인을 다룬 ‘임재경, 마지막 지식인 기자‘, ‘“내 전공은 인간입니다” – 홍승면의 저널리즘‘, ‘화사한, 너무나 화사한 – 정운영의 경제평론‘까지다.

‘이재현의 가상인터뷰’는 그가 ‘가상인터뷰’라는 형식으로 당대 한국 사회의 쟁점을 하나하나 풀어냈다는 데 경외감을 느껴 ‘가장 인상적인 글’ 목록에 담겼다. 잠시 원문을 인용하자면 그(이재현)는 “한국에서 미국이 지닌 의미를 캐기 위해 박정희, 밴 플리트, 사마천, 박현채, 피카소, 래리 킹 등 수많은 사람을 불러냈다. 그가 미국의 의미를 이렇게 거듭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지난 한 해 동안 한-미 자유무역 협정, 평택시 대추리의 미군기지, 전시작전 통제권 환수,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 이라크 주둔 한국군, 북한 핵, 영어 조기교육 같은 ‘미국 문제’들이 줄곧 한국을 옭아맸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엿보기 위해 프랑스공화국의 상징 마리안느를 불러왔고, 일본의 우경화를 살피기 위해 일본 제국군대 장교 이시와라 간지와 좌익 테러리스트 에키다 유키코를 불러들였다.”

또한 “시애틀 추장과 경제학자 헨리 조지를 초대해 부동산 광풍을 입에 올렸고, ‘도박 도시’ 라스베이거스의 초석을 놓은 전설적 갱 벅시를 불러 ‘바다 이야기’를 이야기했으며, 축구공을 모셔서는 월드컵의 그늘을 함께 훔쳐보았다.”

이런 이재현의 글쓰기 방식에 관해 고종석은 “한 편의 ‘대화’를 다 읽고 나면, 그 날 그가 초대한 게스트가 바로 그 즈음의 ‘시사’를 실속있게 체현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화’는 그러므로 골계와 기지와 반성의 언어로 쓰여진 2006년 시사연감이기도 하다”라고 정리했다. 역사와 현재를 두루 꿰뚫는 안목, 내가 세상 무엇보다 바라는 자질이다. (그의 가상인터뷰 시리즈 링크를 걸어 둔다. 바로 가기)

김현의 글을 바라보는 고종석의 시선에는 경외감이 가득하다. 이 책의 제목도 실은 김현의 유고작 ‘말들의 풍경’에서 따온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말로 표현하자면 ‘오마주’인 셈이다. “무단으로 제목을 훔쳐온 데 대한 찜찜함을 추스르며, 오랜만에 고인의 ‘말들의 풍경’을 펼쳐보았다. 이 평론집에 묶인 글들을 쓸 때, 고인은 내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 언어는, 절망스러워라, 내가 한 생애를 더 산 뒤에도 다다를 수 없을 섬세함과 아름다움으로 무르익어 있다.” 고종석은 “내 어쭙잖은 글쓰기의 8할 이상은 김현의 그늘 아래 이뤄져 왔”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고종석에게 김현이 지니는 의미는 그가 나에게 지니는 의미와 얼추 들어맞는다. 나도 2008년 그의 저작을 처음 접한 뒤 기회가 닿는 대로 그의 책을 읽었으며 지난해에는 그가 열었던 글쓰기 강의에도 참여했다. 이 서평뿐 아니라 내가 쓰는 많은 글에는 그의 글쓰기 습관과 전략이 설익은 채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김현은 ‘롤모델의 롤모델’이 될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탐구해봐야만 할 선구자다.

저널리스트 3인을 다룬 글은 내가 언론계에 몸담기 원하기에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이 글 세 편을 읽으면서, 한국 현대사의 최전선에 섰던 선배 저널리스트, 특히 ‘멋진 저널리스트’의 존재를 이제서야 인식하기 시작했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이 분야에 관한 내 이해의 수준은 공시적으로는 조금씩이나마 넓어지고 있지만, 통시적으로는 여전히 앙상하다.

이제부터는 내 이력의 미래를 꿈꾸면서, 단순히 이러이러한 기자가 되겠다고 바라기보다는 롤모델을 통해 미래상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출발점이 바로 임재경 선배, 홍승면 선배, 정운영 선배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어학적 관점에서만 멋지게 바라봤던 고종석도, 글쓰기나 언어학 교양 선생님으로서뿐만 아니라 선배 저널리스트로서 존경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 좀 읽었다’고 거들먹거렸던 시절 잠시나마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럽다. 앞으로는 어디 가서 자기소개를 하며 함부로 ‘독서’를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기에 내 정신의 폭은 아직도 너무나 좁고 깊이는 변변치 못하다. 고종석을 통해 슬쩍 훑어본 선배 지식인들은 내가 감히 흉내 낼 엄두를 내지 못할 위인들이다. 그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내 정신세계의 폭과 깊이는 어떨지, 내가 써내는 글의 수준이라는 것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읽은 기간: 2014/03/08 ~ 2014/04/07

정리한 날짜: 2014/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