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차별에 대한 둔감함

개그콘서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코너가 ‘놈놈놈’이다. 매주 개콘 방송시간에 다른 일을 하다가도 ‘놈놈놈’이 시작하면 일단 TV 앞에 앉는다.

지난주 방송(2일)에서 “우리 소미는 아메리카노만 마시거든”이라는 송필근의 말에 유인석은 “원산지에서 직접 공수한 최고급 원두커피에요!”라며 자판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등장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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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웠던 기분이 싹 가라앉았다. 무엇을 패러디하고자 했는지 바로 이해할 수는 있었다. 다만 나는 공중파 방송이 이렇게나 인종 문제에 둔감하다는 사실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국내에서 많은 사람이 인종 차별 문제에 둔감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80년대 우리나라 인기 개그 코너 중 하나는 ‘시커먼스’였다.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이 코너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덕분에 폐지됐다(누군가는 올림픽 ‘때문에’ 폐지됐다고 아쉬워했으리라). 지난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 결과 “국내 거주 혼혈인의 42.2%가 피부색 등으로 인한 교육, 고용, 혼인에 있어서의 지속적인 차별 등으로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2013년 KBS 2TV ‘안녕하세요’에는 흑인 두 명이 각각 7월과 10월 출연해 한국에서 겪는 인종차별 경험을 토로했다.

 

2014년으로 넘어와서는 이태원 모 주점의 ‘흑형 치킨’ 사건과 KBS 정인영 아나운서의 ‘깜둥이’ 트윗 사건이 발생했다.

어떤 사람들은 ‘흑형’과 ‘깜둥이’라는 말이 왜 인종 차별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는 “‘조센징’은 조선인을 뜻하는 의미인데 그럼 이것도 아무 문제 없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말에는 표면적 의미뿐만 아니라 감정과 역사가 뒤얽혀 있다. 특정 단어가 사회에서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지를 무시한 채 “피부가 검은색이니 깜둥이라고 부르는 게 무슨 잘못이냐”고 말하는 태도는, 나로서는 쉽게 수용할 수 없다.

다시 개콘으로 돌아가 보자. 국내 방송에서 흑인을 따라 하기 위해 흑인 분장을 한 것이 왜 문제일까. 첫째. 인종 특성으로 웃음을 유발하려 한 것 자체가 위험한 행동이다.

세 사람의 등장은 분명 ‘웃긴’ 상황이었다. 곽범, 홍예슬, 김정훈 세 사람은 인종적 특성을 개그콘서트라는 맥락에 녹여냈다. 다른 인종을 따라 하는 분장을 했을 때, 우리는 괜찮을 수 있지만 그들은 모욕을 느낄 수 있다.

2013년 2월 미국 뉴욕주 주의회 의원 도브 히킨드(Dov Hikind)는 유대교 부림절 파티에서 흑인 분장을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결국 공식 사과를 했다(관련 CNN 기사 바로 가기). 지난달에는 국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미국 시트콤 ‘하우 아이 멧 유어 마더'(How I Met Your Mother)가 중국 전통 의상을 ‘시트콤답게’ 따라 했다가 전 세계 팬들의 비판을 받고 역시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관련 오마이뉴스 기사 바로 가기)

어떤 백인이 ‘웃기기 위해’ 한국인 분장을 하거나 (백인들이 생각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따라 한다면 과연 어떨까. 상상이 잘 안 가고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아래 사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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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홀리스터 매장 개점 기념행사를 위해 한국을 찾았던 모델이 경복궁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이 알려지면서 네티즌 대부분은 “동양인 혹은 한국인을 비하한다”며 홀리스터에 맹공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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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4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 방송 직후 저 백인의 ‘동양인 비하’ 행동은 꽤 여러 번 기사화됐다. (enews24 기사 바로 가기)

웃음이 따라올 만한 상황에 다른 인종의 특성을 끌고 들어오는 행위는 어떻게 포장하더라도 잘못된 일이며,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차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이런 행위는 해당 인종 사람들에게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국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나타난 흑인 분장이 위험한 것은 한국의 콘텐츠가 더는 한국에서만 소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내수용 한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지드래곤이 얼굴을 새까맣게 칠한 뒤 올린 인스타그램 셀카는 순식간에 해외 웹으로 퍼져 나갔고 대차게 욕을 먹어야만 했다. 흑형치킨 논란이 일었을 때, 한 외국인 네티즌은 어떻게 알았는지 네이버 뉴스에까지 찾아 들어와 영어로 한국의 인종차별을 꼬집는 댓글을 남겼다(다만, 그 네티즌이 남긴 트위터 계정으로 들어가 보자, 그는 기본적으로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코리아뱅‘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한국의 각종 소식을 재빠르게 영어로 번역해서 소개하는 곳인데, 특이한 점으로 이곳은 국내 인터넷에서 생성되는 각종 댓글까지도 영어로 번역한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각종 막말은 지금 이 순간도 영어로 번역되고 있을 수 있다. 인터넷 막말 가운데 꽤 많은 경우는 백인을 제외한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 비아냥, 조롱 등이다.

인종 차별은 반론의 여지 없이 옳지 못한 행위다. 그런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한 민감함이 부족한 것 같다.

인종 차별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한국 사회 핵심 문제의 중앙에 다다를 것이다. 우리는 과연 성숙한 자세로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면 언제쯤 그 성숙함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물리적으로나 비물리적으로나 세계화된 세상을 살고 있다. 늘어나는 교류 속에서 다른 인종에게 상처 주지 않는 태도는 언제쯤 우리 내면에 충분히 정착될지 고민이다.

인종 차별에 대한 둔감함을 극복하는 날은 언제 다가올까.